접주의 집은 대나무밭 되어 사라졌지만…샘물은 마르지 않았네

접주의 집은 대나무밭 되어 사라졌지만…샘물은 마르지 않았네

지난 19일 박성순 보성문화원 이사가 전남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 사곡초암정사 뒤편에 있는 박태로 집터에서 깨진 장독을 가리키고 있다. 정대하 기자

“태로야 태로야 박태로야/ 보성군민 다 살려 놓고/ 검은 콩알 하나 못 이겨서/ 저세상으로 가시었는가.”

동학 보성 접주 박태로가 효수된 뒤 사람들은 이런 노래를 지어 부르며 슬퍼했다. 1895년 음력 4월27일, 전남 순천에서 처형됐을 때 44살이었다. 그의 본명은 박태길(朴泰吉)이다. 지난 19일 전남 보성군 노동면에 있는 용산서원에서 만난 박성순(76·보성문화원 이사)씨는 “동학 접주였던 ‘태’ 자, ‘로’ 자 할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그런데 ‘태’ 자, ‘길’ 자로 찾아보니까 (진원 박씨 장계파) 족보에 함자가 있더라”고 말했다. 용산서원은 조선 후기 유림 죽천 박광전(1526~1597)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박태로는 죽천의 11대손이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것을 ‘역적질’로 탄압했던 탓에 후손들은 이를 쉬쉬하고 살았다.

접주의 집은 대나무밭 되어 사라졌지만…샘물은 마르지 않았네

지난 19일 전남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 박일재(왼쪽)씨와 박성순 보성문화원 이사가 집안 선대였던 박태로 접주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박일재씨의 도움으로 박태로 접주가 살았던 집터를 발견했다. 정대하 기자

옛 집터 앞, 마르지 않은 샘

“동학 이후 (피붙이들이) 다 떠나고 그래서 우리 종가가 폭삭 망해불고. 기울어지던 집안이 그런 일을 한번 당해붕께는, 그 이후로 참 ‘못 죽어 살았다’고 합디다.” 박태로의 고향인 전남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에서 만난 박일재(87)씨는 “집안 할아버지로, 오직 만민을 위해서 희생을 하셨는데, 결국은 몰아세우는 바람에 돌아가셨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박태로가 효수된 뒤 가족들이 그의 주검을 수습해 선산에 안장했다. 그의 직손들이 몇년 전 묘를 납골묘로 이장했다고 한다. 겸백면 사곡리 박태로 접주의 옛집은 사라져 대나무로 뒤덮였지만, 집 앞 샘엔 아직도 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접주의 집은 대나무밭 되어 사라졌지만…샘물은 마르지 않았네

법무아문 산하 ‘권설(임시)재판소’는 1895년 3월21일 보성 동학 접주 박태로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박태로는 전남 장흥의 동학 접주들과 교류했을 가능성이 크다. 1891년부터 장흥 유생 이인환·이방언·문남택 등이 동학에 입문한 뒤, 장흥·보성·강진·완도 신도 수가 한때 1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세가 대단했다. 보성 농민군은 1894년 1월10일(이하 음력) 현 전북 정읍시 고부면에서 일어난 ‘고부 봉기’에 참여했다. 오지영의 ‘동학사’엔 “당시 백산에 모여든 사람은 누구누구냐. (중략) 보성에서 문장형, 이치의 등이오”라고 적었다.

역사적인 동학농민군이 탄생했던 현장에 보성 백성들도 참여했다. 전봉준·손화중·김개남은 그해 3월21일 무장현(현 고창군 무장면)에서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보국안민)는 기치를 내걸고 전면적으로 봉기했다. 4월7일 지금의 정읍시 덕천면에 있는 황토재에서 처음으로 전라 감영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장성 월평리 ‘황룡강 전투’(4월23일)도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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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때 보성 접주였던 박태로는 진원 박씨 장계파 족보에 박태길이라는 이름으로 올라 있다. 정대하 기자

농민군은 4월27일 전주성을 점령한 뒤 개혁안을 요구하고 ‘전주화약’을 맺은 뒤 일시 해산했다. 보성 농민군들도 전주화약 이후 보성으로 돌아왔을 것으로 보인다. 농민군은 그해 5~7월 전라도 53곳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신분 차별을 없애는 등 개혁에 나섰다. 하지만 각 지역의 집강소 통치는 고을별로 달랐다. 운봉·순창과 나주에선 유생과 향리들의 치열한 반대로 집강소가 설치되지 못할 정도였고, 김개남의 영향권인 남원에선 집강소 활동이 활발했다. 박맹수 원광대 명예교수는 “보성은 농민군 쪽과 유생 및 향리 쪽의 세력균형을 바탕으로 한 타협적 성격의 집강소였다”고 설명했다.

보성 동학 접주 박태로는 ‘민가토색, 사감보복행위 엄금’ 등의 포고문을 내걸었다. 보성군수 유원규는 박태로 접주를 찾아가 협조를 구했다. 집강소 통치기를 거쳐 2차 봉기에 나선 농민군은 1894년 12월15일 장흥 석대들 최후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보성에선 박태로와 유원규가 체포돼 압송됐으나 1895년 3월21일에 풀려났다. 법무아문 산하 ‘권설(임시)재판소’는 “동학당에 들어가 지방의 안녕을 해친다는 의심을 받아, 심문을 특별히 하였으나 증거가 분명하지 않았다”며 석방했다. 그러나 반동이 시작됐다. 보성군수 유원규는 이후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는 토포사로 임명됐고, 전라감사 이도재는 박태로를 다시 체포했다. 박태로의 손자뻘인 박일재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풀려난 뒤 사돈집에서 은신하고 계셨는데, 누가 밀고했다고 해요. 잡혀가면서 매창(박성순씨 조부)에게 ‘나는 뜻을 이루질 못하고 가니 알아서 뒷일을 정리하라’고 당부했다고 합디다.”

접주의 집은 대나무밭 되어 사라졌지만…샘물은 마르지 않았네

박기순의 큰오빠 박화강 전 한겨레 기자는 보성 득량면 자택 불이학당에서 연 ‘동학강좌’에서 “박태로 동학 접주가 집안 할아버지가 된다”고 증언했다. 그의 뒤편에 걸린 그림은 이상호 작가의 작품 ‘녹두장군’이다.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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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로와 ‘임을 위한 행진곡’

박태로의 선조인 죽천은 함열·회덕현감을 지낸 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6살 노령에 의병을 이끌었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켜 화순 동복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으나 전투 중 사망했다. 죽천의 두 아들은 임진왜란·정유재란에 참전했고 손자 3명과 증손자 1명은 병자호란에 의병으로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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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죽천 박광전 선생을 배향한 용산서원. 정대하 기자

죽천의 10대손이자 박태로에게 ‘집안 아저씨’뻘이 되는 박문용(1882~1929)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독립군이다. 1913년 보성 겸백면장 때 공금 327원6전을 들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군자금으로 제공했다. 박문용은 상하이 임시정부 국내특파원으로 귀국해 1920년 8월 조선총독 등을 제거할 암살단을 조직하던 중 체포돼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김덕진 광주교대 교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 때 4대에 걸쳐 의병활동을 하고,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를 다수 배출한 문중은 매우 드문 사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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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2월 광주 망월동 5·18 구묘역에서 열린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 한겨레 자료사진

‘노동자의 누이’ 고 박기순(1957~78)도 죽천의 후손이다. 1978년 7월 노동자 야학인 들불야학을 창립한 박기순(21·전남대 사범대)은 그해 12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5·18시민군 대변인 고 윤상원 등 들불야학 동지들은 5·18항쟁의 불꽃이 됐다. 1982년 2월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을 계기로 나온 ‘임을 위한 행진곡’은 한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

보성 동학 접주의 죽음을 슬퍼하던 노래의 맥락은 5·18 진혼곡으로 이어졌다. 박기순의 둘째 오빠 고 박형선(1951~2022)도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시대의 풍운아’였다. 전남대 재학 때인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던 그는 1980년 5월17일 체포돼 고초를 겪었던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다. 박기순의 큰오빠 박화강(78) 전 한겨레 기자는 5·18 보도 검열에 항의해 전남매일 기자 집단사직을 주도하다가 해직됐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임을 위한 행진곡’ 중) 동학 접주 박태로, 그리고 선조·후손들의 치열했던 삶과 어울리는 대목이다.

정대하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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