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사는 아저씨'보다 딸이 더 무서운 이유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나는 오늘만 산다."
영화
에 나오는 대사다. 주인공 태식(원빈)은 영화 속 최강자다. 다음이 없는 삶을 오늘만 산다는 것으로 표현했고, 다음이 없이 사는 사람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말이 맞다면 오늘만 사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이가 존재한다. 바로 지금만 사는 사람이다. 우리 딸이 그렇다. 딸은 지금만 산다.
'지금'만 사는 딸
밥이 나온다. 뒹굴거린다. 뒹굴거리고 싶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한 숟갈이 남았다. 한 숟갈만 먹으면 맛있는 간식이 기다린다. 젤리랑, 초콜릿이 코 앞이다. 그런데 딸은 "이제 그만 먹을래"라고 말한다. 그야말로 '헉'이다. 그 다음에 간식이 있건 말건, 재밌는 놀이를 하건 말건, 지금은 이 한 숟갈을 먹기 싫다. 그러니 먹지 않겠다. 딸은 그런 태도다.
한 발짝만 더 나가면 괜찮은 미래가 기다리는데 한 발짝을 나가지 않는다. 엄마가 먹여주면 잘 먹는데, 스스로는 먹지 않는다. 마음에 안드는 식사가 나오면 졸린 눈을 하고선 식탁에 엎드린다. "밥 먹자"고 하면 "졸려"라고 말한 뒤 방에 들어간다. 그리고 잔다. 보통은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난다. 식사를 마친 오빠가 간식을 들고 TV를 틀면 슬그머니 일어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하고 싶은 걸 한다. 보통 전날 했는데 너무 재밌었거나, 오빠가 너무 재밌게 했거나, 엄마가 "잘했다"고 크게 칭찬한 경우들이다. 어느 날 아침 7시가 안 된 시간에 거실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오빠가 전날 산 합체변신로봇이다. 로봇을 한참이나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는 중이었다. 오빠 선물이 탐이 났던 모양이다.
어떤 날은 눈을 뜨자마자 엄마에게 다가가 "팬케이크 만들자"고 속삭였다. 일요일인 전날 팬케이크를 만들었고, 엄마는 "다음 주말에 만들자"고 약속했다. 딸은 전날 팬케이크 만든 게 너무 재밌었고, 또 하고 싶었고, 약속은 모르겠고, 나는 지금 하고 싶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엄마가 "평일 아침에 어찌 만드니"라고 하니 '뾰루통' 표정으로 바뀌었다. 뒤늦게 일어난 나에게 아내가 전한 상황이다.
지금만 살기 때문에 약속이나 협상은 무용지물이다. 딸은 활동성이 떨어지고, 나무에도 잘 걸리며, 흙이나 모래가 잘 묻는 '치렁치렁' 치마를 좋아한다. 엄마가 "오늘은 (치렁치렁) 이 옷 입고, 내일은 다른 치마 입자?"고 물으면 딸은 큰 소리로 "네"라고 외치며 고개를 '끄덕'인다. 누가 봐도 약속 성사다.
이튿날이 됐다. 딸은 다시 '치렁치렁' 치마를 찾는다. 엄마가 "어제 약속했잖아"라고 말한다. 딸은 "나 이거 입을래"라고 말하며 고집을 부린다. 약속을 기억하든 안 하든 그건 중요치 않다. 딸에게 약속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미 지난 과거일 뿐 지금은 '치렁치렁' 치마가 눈 앞에 있고, 나는 그 치마를 입고 싶기 때문이다.
가끔 주말이나 휴일 아침, 또는 저녁에 목욕을 마치고 나온 뒤 안경을 찾으러 다니곤 한다. 처음엔 '건망증인가?', '내가 어디에 놔뒀기에 이렇게 기억이 안 나지'라며 자책했다. 범인은 딸이었다. 거실을 오고 가는 딸 눈에 안경이 띄었고, 안경을 쓰며 놀던 딸은 어딘가에 안경을 놔두고 사라진다. 딸을 붙잡고 물어봤자 소용이 없다.
이미 그 때를 벗어난 딸은 안경이 어딨는지 모른다. "안경아 어디 있니" 숨바꼭질을 몇 차례나 했다. 다음 일정이 있을 땐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앞에 종이가 보이면 그게 무엇이든 가위로 '쓱쓱' 오리곤 해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딸에게 "네 물건이 아니면 항상 물어보고 써야 해. 알았지?"라고 말하지만 그 때 뿐이다. 대답은 어찌나 잘하는지.
지금만 사는 딸은 감정 표현이 참 빠르다. 잘 울고 잘 운다.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넘어졌을 때 그 통증이 뇌로 전달되는데 분명히 시간이 걸릴 텐데 빛과 같은 속도로 운다. 많이 아픈지, 적게 아픈지 상관없이 운다. 다쳤다는 부위를 살펴보고서 '괜찮네'라고 확인해주면 몇 번 중얼거리다 금세 울음을 그친다. 울음이 사라진 딸은 어느새 '랄랄라'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놀이에 집중한다.
아내는 '랄랄라' 하는 딸을 보면서 '약 오른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지금만 사는 딸은 그야말로 최강자다. 약속, 협상이 소용 없으니 결국 큰 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큰 소리를 내고 나면 결국 (어른인) 우리가 졌다는 패배감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어른답게 좀 우아하게 저 최강자(?)를 무너뜨릴 방법이 없을까.
허리 끊기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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