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P에서 보낸 1년, '죽고 싶다' 벽면 채운 낙서들
살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꼭 몇 번쯤 있다. 그중 한 번은 참으로 참담했던 기억이다.
201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4주간의 훈련을 막 마치고 이등병으로 자대에 배치됐을 때였다. 보직은 소총수, GOP(General Out Post, 휴전선 철책) 초병이었다. 강원도 철원과 화천의 경계지역, 험한 산악지대 가운데 우리의 소초가 있었다.
훈련소에서부터 원한 근무지였다. 분단된 조국의 최전선, 끝없이 이어진 철책을 지키는 일이 아닌가. 어차피 국방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면 그런 곳에서 하고 싶었다. 그 상징성부터 험한 산세까지가 내게는 모두 매력으로 다가왔다.
무엇이 잘못되었단 걸 느끼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은 특히 추웠다. 소초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철책선이 있는 섹터까지 올라가면 수통은 얼어붙어서 물이 나오지 않았다. 한 분대에 두어 켤레 있는 낡은 방한화는 죄다 선임병들 차지, 일병 이하는 사제 내복조차 입을 수가 없었다. 보급품으로 지급된 옷을 이것저것 죄다 껴입고 올라간 섹터의 추위는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방탄을 초소 벽면에 거듭 박으며, 죽고 싶다고, 이대로 죽어서 딱 몇 시간 뒤 해가 뜨고 난 뒤 깨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초소 벽면 가득한 낙서들, 이십대 청춘의 그 모든 분노와 고통과 절망의 아우성들이 십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에 선하다.
GOP에서 보낸 1년, '죽고 싶다' 벽면 채운 낙서들
혹독했던 겨울, 우리는 왜 그곳에 있어야 했을까
GOP의 겨울은, 특히 칼바람이 절벽을 따라 휘몰아치던 북녘 언덕은 정말이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계급이 높다는 이유로 초소 안에서 나오지 않던 사수가 쌍안경을 건네며 저기 북한 애들을 보라고 했다. 불과 몇 킬로 안에 그들이 있었다. 근무교대를 나온 북한 병사는 그리 두텁지도 않은 외투를 돌려 입었다. 전번 근무자가 외투를 벗으면 후번 근무자가 그를 이어 입었다. 사수는 저걸 보라며 그래도 우리가 낫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나 모두가 알았다. 남녘을 바라보는 햇살 드는 그곳보다 북녘을 바라보는 이곳이 훨씬 추우리란 걸.
GOP에서 보낸 1년의 시간은 아마도 죽기 전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몸과 마음을 상하였던가. 과호흡을 호소하고, 인대가 나가고, 발목이 크게 돌아가고, 손가락이 굽어지지 않고, 그밖에 온갖 이유로는 탈출할 수 없는 그곳을 수많은 청춘들이 순찰하고 지켜내었다. 누구도 넘어오지 않는 그곳을, 누구로부터의 존중도 받지 못하면서 말이다.
다큐멘터리
이 관객수 5000명을 넘어섰다. 개봉 첫 주 본 영화는 애써 봉인해 둔 내 지난시간을 떠오르게 했다. 너무 추워 6시간마다 교대하는 비상근무 체제로 근무를 서야 했던, 섹터를 오르내리는 시간과 여러 부상자들 탓에 연달아 4시간 이상을 잘 수 없었던, 그러고도 겪어본 적 없는 추위 속에 노출돼 덜덜 떨어야만 했던, 왜 이토록 많은 젊은이들이 이 같은 형벌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초소 벽면 가득한 '죽고 싶다'는 절망과 온갖 욕설들을 읽어 내리며 버텼던 그 시간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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