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 연적이 거기서 왜 나와?' 뚱딴지 같던 문장의 결말
가끔은 글은 역시 읽는 것이지 듣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듣는 것도 속도를 조절하거나 한 글자 한 글자 나눠서 듣거나, 반복해서 들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 눈으로 단어와 문장을 보면서 나만의 속도로 뜻을 음미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은 다 잊어버린 점자를 다시 배워볼까 할 때도 있고, 시도 아닌 산문을 외워서 음미해 볼까 할 때도 있다
얼마 전에 피천득의 이란 제목의 수필을 들을 때도 그랬다. 교과서에서 수필의 정의를 배웠고, 이런저런 책에서도 수필이란 문학 장르에 관한 설명을 읽거나 들었지만,
에서만큼 내 마음이 끌린 적은 없었다. 그리 길지 않은 글 전체가 수필은 무엇이라고 직접적으로 비유하거나 설명하고 있었는데, 모두 다 외우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작가 피천득이 청자 연적을 보고 느낀 마음
그런데 그 첫 문장,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는 왠지 뚱딴지같았고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그냥 연적도 아니고 청자 연적?'
도대체 이게 뭔 소리일까
을 듣는 내내 머릿속이 간질거렸는데, 글 끝에 그 답이 있었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청자 연적이 거기서 왜 나와?' 뚱딴지 같던 문장의 결말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을 가져오는 마음의 여유. 이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동안 내가 그토록 바랐고 이뤘어야 했던 그것, 그게 바로 작가 피천득이 청자 연적을 보고 느낀 마음의 여유였다.
'시력 잃고 알게 된 세상'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나는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 손길 닿는 대로 썼다. 그렇다고 소설처럼 허구를 말하지는 않았고, 가상의 인물이나 장소를 만들지도 않았다. 솔직하게 마음이 허락하고 머리가 기억하는 것들을 쓰려했다.
때론 무대 위 배우의 독백처럼, 때론 보고 싶은 옛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때론 사랑하는 이와의 가벼운 대화처럼 그때그때 떠오른 하고 싶은 말을 썼다.
이렇게 한 편 한 편 글을 써 가면서 나는 굳이 어떤 장르의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글들이 문학 장르로서의 수필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 내 글은
에서 말한 대로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하면서도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를 느끼게 하는 글이었을까?
너무 기가 막히면 웃음이 나온다더니 지금이 딱 그렇다. 어찌 감히 이런 질문을 내가 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질문을 잘못했다. 작가 피천득은 수필이란 문학 성격이 그렇다고 한 것뿐이지 그런 수필을 써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글감이나 글재주와는 별도로 글 쓰는 이는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을 이뤄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물었어야 한다.
"나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글을 쓰고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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