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 야산에 걸린 가슴 아픈 현수막...정녕 한국이 민주주의인가
지금까지 33편의 글에서 한국전쟁이란 치명적인 우리 현대사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하나하나 되새겨 보고 있다. 이 글 역시 쓰는 사람이 주제를 조망하는 각도가 있고, 그것과 같든 다르든 읽는 사람이 읽어가는 각도가 있다. 글을 이어가면서 스스로 다짐하듯, 읽는 분들에게 당부하듯 이 글의 각도를 다시 한번 상기하고자 한다.
한국전쟁은 다시는 벌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터질 수 있다. 전쟁이 비극일수록 그것을 다시 되돌려서 보고 또 봐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전쟁이 또 터지면 나는,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떠올리는 것이다.
한국전쟁을 리뷰하면 그때 그랬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일이 보이고, 그때는 그랬지만 다시는 그러지 않아야 할 일도 드러난다. 어디에 중점을 두든 이런 점검과 성찰은 두 번째 한국전쟁을 막아낼 중요한 인식의 기반이 될 것이다. 전쟁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를 견고하게 준비했을 때 비로소 막아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게 이 글을 이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역혐의자 살상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남침으로 개전해 낙동강까지 밀어붙이고 있을 때, 수도를 빼앗기고 속절없이 밀려가는 전황에 대한 반사적 대응은 원군을 급히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이제 유엔군의 도움으로 반격을 시작하자 북진은 희망이 됐고 그 최대치는 '내친김에 압록강까지'가 됐다.
전면전이 아니었으면 정치적 논쟁이나 국지적 전투로 꾸역꾸역 틀어막을 수도 있었겠지만, 전면전이 터지자 모든 것은 사생결단이 되고 말았다. 군대뿐 아니라 일상 깊숙한 곳의 자잘한 것까지 생사를 뒤흔드는 극단이 뒤덮었다. 그래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 정권에게 남침 개전의 원죄를 크고 깊게 진하게 물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어쨌든 유엔군의 반격이 성공하면서 북진은 무력으로 이루는 통일과 남침에 대한 정당한 복수가 됐다. 그러나 그나마 규율돼 오던 생존본능이 이념으로 포장돼 악마의 가면을 쓰고 폭발했다. 바로 부역혐의자 살상이다. 그때는 그랬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아야 할지, 아니면 또다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지, 결코 쉽지 않은 자문자답의 한 대목이다.
부역자 살상은 시기적으로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제일 먼저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1950년 8월부터 전선에서 벌어진 군인에 의한 민간인 즉결처분이 있었다. 희생자 숫자는 나중에 발생한 집단학살에 비해 많지는 않았다. 그다음 1950년 10월 초순부터 수복지구에 경찰이 복귀하기 직전부터 복귀 이후까지, 부역혐의자 살상이 남한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이번 글에서 주목하는 대목이다. 북진통일이 좌절하고 다시 전선이 급속하게 남하하던 1.4후퇴와 그 다음의 재수복 시기에 부역자 학살은 한번 더 벌어졌다.
국군에 의한 부역혐의자 총살은 가평, 강화, 고양, 여주, 남양주, 포천, 가평 등 여러 지역에서 발생했다.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즉결처분은 1950년 8월 20일 경남 통영일 것이다. 통영 수복 직후 주민 일부가 부역으로 총살을 당했다. 이후 경남, 경북을 거쳐 충청남·북도와 경기도에서 유사한 총살사건이 발생했다. 전쟁에서 그것도 접적 최전선이라는 치열한 전투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불가피했다고 할 수는 있으나 실제의 적대행위와 잠재적 적대위험 등은 진지하게 돌아볼 일이다.
전선이 북상하고 경찰이 복귀하기 시작한 1950년 10월 초순부터 부역혐의자들에 대한 살상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전쟁의 공포 속에 우발적인 반발이나 충동적인 보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국전쟁에서의 부역자 살상은 그것과는 다르다. 살상이 광범위하고 조직적이었다. 그것은 이승만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갖고 법령과 제도로 시행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 직후 국가보안법을 제정(1948년 12월 1일)해 남한 정부에 따르지 않는 행위를 북한을 이롭게 하는 반국가 이적행위로 등치시켜 처벌하기 시작했다. 국가보안법의 비민주 반인권은 새삼 재론할 것은 없다. 이 법으로 1949년 한 해에만 11만 8천여 명이 처벌됐다. 사형을 면한 이들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들을 마구잡이로 처형한 것은 앞서 살핀 바와 같다.(관련기사 : 서울 빼고 거의 다 죽였다... 이게 '인종청소'랑 뭐가 다른가 https://omn.kr/26tly)
적의 손길이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1950년 6월 25일), 비상시 향토방위령(1950년 7월 22일), 계엄하 군사재판에 관한 특별조치령(1950년 7월 26일) 등을 차례로 공포했다. 전쟁이란 특수상황에 당연한 법적 조치들이지만, 문제는 법과 제도의 집행 과정에서 커지곤 했다. 인민군 점령지역에 남아 있던 대다수 잔류민과 일부 국군 패잔병들이 모두 가혹한 처벌을 받을 수 있는 부역 혐의자가 됐다는 것이다.
정부와 국군이 38선을 제대로 방어해내지 못한 현실이나 국민을 속이고 먼저 도망간 대통령과 정부 등은 아무런 고려 요소가 아니었다. 오직 적의 손길이 닿은 자국민은 일단 부역으로 처벌할 대상이 된다는, 숨 막히는 반공의 근본주의가 거칠게 발동했다.
이승만 정부는 9.28 서울 수복 이후 10월 4일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부)를 설치해 이듬해 5월 24일까지 운용했다. 합수부는 부역자의 체포와 기소를 전담하고, 재판은 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관할했다. 부역자는 핵심은 북한 점령기의 행정기관이나 내무서 등에 종사하거나 연루된 주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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