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폭발로 무너진 도시, 그 이후의 반전
두 번의 폭발로 무너진 도시, 그 이후의 반전
전북 익산은 철길 위에 세운 도시다. 은유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정말로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곳에 철길이 놓이고 기차역이 생기면서 새로운 도시가 만들어졌다.
익산을 처음으로 지난 철길은 '호남선'이었다. 1899년 9월 경성(노량진)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이 놓이고, 다시 몇 년 뒤인 1905년엔 경성(영등포)과 부산(초량)을 잇는 경부선이 놓인 뒤였다. 교통수단이라고 해봐야 말이나 소가 끄는 달구지와 돛단배가 전부이던 시절이었으니 기차가 가져온 변화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철길 위에 세운 도시, 이리
물길과 옛 시장을 따라 흐르던 모든 것들이 이제 철길을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옛 이리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새로운 길이 생기고 건물들이 올라갔다. 근대 신시가지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도시가 빠르게 몸집을 키워갔다. 먼저 기차역 동쪽(중앙동)에 새로운 시가지가 생겼고, 예로부터 오일장이 섰던 솜리마을 주변(인화동)으로 시장도 빠르게 커졌다. 금강이라는 커다란 물길의 길목에서 오랫동안 관문 역할을 해온 강경과 일찍이 12목 가운데 하나로 전라도의 수도 역할을 하던 전주는 거꾸로 힘을 잃어갔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 넘어온 일본인들도 철도역 주변으로 뿌리를 내렸다. 1910년 무렵 겨우 십여 명 남짓이었던 이곳의 일본인 수는 철길이 놓인 1912년, 1000여 명으로 늘었다. 3년이 지난 1915년엔 다시 1893명(550호)으로 늘어 348명(82호)이던 조선인보다 몇 곱절이나 많아졌다.
역 동쪽으로 철길과 나란히 이어진 가장 번화한 거리를 '영정통'(중앙로1길)이라 불렀다. 1914년에 이리좌라는 극장이 들어섰고, 뒤이어 이리구락부, 호남구락부, 철도구락부 등의 오락시설들이 잇따라 자리를 잡았다. 이리좌가 영정통의 시작이었다면, 그 반대쪽 끝엔 삼남극장이 있었다.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 때 천장이 주저앉는 바람에 가수 하춘화씨와 지금은 고인이 된 이주일씨가 크게 다쳤다던 바로 그 극장이다.
영정통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익산군청과 이리읍사무소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 삼남은행 등의 업무시설이 들어섰고, 자연스럽게 여관과 식당, 술집들이 자리를 잡았다. 일본인 지주와 상인, 기업가들이 몰려들면서 일본인 신시가지가 만들어졌다. 안타깝게도 조선인들은 일본인의 생활권 밖으로 밀려나야 했다.
원도연 원광대학교 디지털콘텐츠학과 교수는 "이리역의 등장과 함께 호남의 근대가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다. 옛 이리가 교통 거점을 넘어 '근대 문명의 관문'이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리역 앞의 창인동, 중앙동 일대는 호남에서 가장 번성한 상업구역이었다. 이리를 중심으로 발전한 대농장의 지주와 농업기술자, 그들을 찾아 들고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머물고 소비하면서 근대적인 풍물을 발전시켰다."
신귀백 익산근대문화연구소 소장은 옛 영정통이 1970-80년대까지 번성했다고 말한다. 여러 행정기관과 금융기관, 금은방과 식당 등이 모여있어 "한 마디로 호남북부권역의 원스톱 서비스 공간"이었다는 것.
"중앙동은 호남의 명동이었다. 시민들은 중앙동 금은방에서 결혼예물을 마련하고, 100여 개가 넘는 양장점에서 옷을 맞췄다. 전흥라사에서 옷감을 떼어 모니카 양장점, 남성테라에서 옷을 맞추고, 신한당과 중앙사에서 패물을 구입하면서 달나라 혹은 영빈예식장에서 음식을 나누며 새로운 삶을 축하해 주었다."
여러 길이 만났다 흩어지는 도시
호남선이 개통하던 1912년 3월 6일, 익산-군산을 잇는 군산선도 함께 개통했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드넓은 호남평야를 등지고 있어 일찍이 개항의 운명을 맞은 군산항이 개항한 지 13년 만이었다. 군산선은 겨우 24.7km의 짧은 철길이었지만, 호남평야에서 거둬들인 어머어마한 쌀들이 이 길을 따라 군산항으로 실려온 뒤 곧바로 배에 실려 일본으로 모조리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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