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낭기의 관점] "한국을 통치하는 것은 정부인가, 의사 단체인가?"

[김낭기의 관점]

의·정 갈등 속에 대한의사협회와 의대 교수 단체가 18일 집단휴진을 앞둔 가운데 서울 시내 한 대학 병원에서 의료진이 걸어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의대 정원 증원을 둘러싼 의료계 집단 행동이 3개월 넘도록 계속되고 있다. 특정 집단이 정부 정책에 반발해 이렇게 장기간 집단 행동을 벌이는 일은 거의 전례가 없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의대 정원 증원 문제를 떠나 특정 집단이 정부 정책 결정에 어디까지 관여하고 개입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민주정치에서 이익단체는 정부 정책 결정 과정에 지지나 반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그 단체의 이해관계가 걸린 정부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목소리를 내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를 통해 여러 가지 긍정적 역할을 한다. 정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정부 정책안에 대해 대안을 제시한다. 문제점 지적과 대안 제시는 정부 정책안이 합리적인지 아닌지에 관한 사회적 토론을 불러일으킨다. 의사 단체 같은 전문가 단체는 정책의 전문성을 높여주기도 한다. 정부는 이익단체의 주장과 사회적 토론 내용을 반영해 정책을 수정 및 보완한다. 이렇게 해서 이익단체의 활동은 정책의 합리성과 민주성을 높이게 된다.

의사 단체, 의대 증원 문제점 지적과 대안 제시는 긍정적

의대 정원 증원과 관련해 의사 단체들도 이 같은 긍정적 역할을 한 점을 인정할 수 있다. 의사 단체들은 필수 의료나 지역 의료 붕괴가 그저 의사 수를 늘린다고 해서 해결될 수는 없다는 점을 줄기차게 지적했다. 의사들이 생명을 죽이고 살리는 필수 의료 분야를 기피하는 주요 이유는 의료 수가(건강보험 공단이 의료 행위에 대한 대가로 주는 돈) 책정의 불합리성과 의료 소송 부담 때문이라고 했다. 의사들이 지역 의료계를 떠나 수도권으로 집중하는 이유는 지역의 열악한 사회·경제적 환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빅5’로 불리는 서울의 상급종합병원으로 환자가 몰릴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의료 시스템 탓이라고  했다.

 

정부는 이런 지적을 반영해  필수 의료 분야에 향후 5년간 건강보험 재정 10조원 이상을 투자하겠다고 했다. 이식이나 심뇌혈관 질환 같은 중증 질환 분야에 5조원, 저출산으로 타격을 입은 소아와 분만 분야에 3조원, 필수 의료기관 간 네트워크 구축에 2조원 이상을 투자하겠다고 했다. 정부는 이미 올 한 해에만 중증, 응급, 소아·분만, 심뇌혈관 질환 등을 중심으로 1조2000억원 이상 수가 인상을 확정해 중증‧응급 수술 수가는 최대 3배, 6세 미만 소아 심야 진료에 대한 보상은 2배 이상 올렸다고 했다.

 

정부는 의료 사고 안전망 구축 방안도 밝혔다. 의료계, 환자 단체, 전문가들과 논의해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안을 마련했고, 올해 안에 국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초안의 핵심은 의사가 책임보험과 종합보험에 들면 의료 사고에 대한 법적 책임을 대폭 완화해 준다는 내용이다. 필수 진료과 의사에 대해서는 고의적 불법행위가 없는 한 환자가 가벼운 상해는 물론 중상해를 입어도 형사 처벌을 받지 않도록 했다. 환자가 사망했을 때라도 고의적 불법이 없으면 감형을 받고, 불가항력일 때는 처벌되지 않게 했다. 정부는 모든 의사가 책임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하고, 필수 진료과 의사의 책임보험비는 정부가 지원하기로 했다.

 

정부는 지역 의료 대책도 내놨다. 우수한 지역 국립대병원과 종합병원을 필수 의료 중추로 육성하고, 지역 내 작은 병원들과 협력 진료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지역 암센터를 중심으로 암 치료 역량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특별회계, 기금 등 지역 필수 의료를 살리기 위한 별도의 재정 지원 체계를 신설해 지원하겠다고 했다.

반대 넘어 정책 '무산' 시도는 민주 정치 원리 위배

의료계는 의대 정원을 갑자기 늘리면 의대 교수와 시설이 부족해져 의료 교육의 질이 떨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자 정부는 “대학이 필요로 하는 교수를 바로 신규 채용할 수 있도록 올 8월까지 대학별 교수 정원을 가(假)배정하고, 내년 대학 학사 일정에 맞춰 신규 교수 채용을 완료하겠다고 했다. 국립대는 전임 교원을 1000명 늘리기로 하고 충원을  차질 없이 진행하겠다고 했다. 의대 시설 증개축 또는 신축이 필요한 공사는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해  신속히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정부가 의대 정원 증원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장애 요인들을 제거하고, 의료 환경 개선을 위한 새로운 방안을 도입하기로 한 것은 의료계의 문제 제기 덕분이다. 의대 정원 증원이라는 정책 결정 과정에 의사 단체들이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면 정부가 이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의사 단체의 활동은 정부가 의대 정원 증원과 관련한 여러 가지 현안들을 검토하고 해결 방안을 찾게 하는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 사태는 여전히 해결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18일  하루 전면 휴진 (총파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전국 40개 의대 교수 단체인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도 휴진과 ‘전국 의사 총궐기대회’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들은 17일부터 서울대병원·분당서울대병원 등 소속 병원 4곳에서 무기한 휴진을 하겠다고 결의했다. 서울대병원 외에 빅5로 불리는 상급종합볍원 의사들도 속속 집단 휴진에 동참하겠다고 한다.

의사 단체들은 의대 정원 증원 전면 백지화를 주장한다. 의대 정원 증원을 ‘의료 파괴’라고 한다. 의대 정원 증원 정책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한다. 의사들은 정부의 합법적 정책 결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듯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과 의료 개혁 정책을 ‘의료 농단’ ‘교육 농단’이라고 한다. 정부는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할 권한과 책임을 갖는다.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권한이고 책임이다. 그런 정부의 정책 결정을 ‘농단’이라고 하는 것은 정부의 고유 권능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정책 실패에 정부는 책임지나 이익단체는 책임 안 져

민주 국가에서 어떤 집단이든 정부 정책에 반대할 수 있다. 그러나 정책 목표와 결정 과정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데도 자기들 주장과 다르다고 해서 반대 의견 제시를 넘어서서 정책을 무산시키려 한다면 정부의 역할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의사와 의대 학생들은 의대 정원 증원 정책이 절차 위반이고 공익 침해이니 중지시켜 달라고 소송을 냈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과 서울고등법원이 잇달아 각하하거나 기각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의대 정원 증원 정책이 의사들이나 의대 학생들의 소송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서울고등법원은 한발 더 나아가 의대 정원 증원이 의대생들의 학습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지만, 의대 정원 증원을 통해 실현하려는 공익이 의대생들이 누려야 할 학습권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결했다.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결정의 근거도 나름대로 갖췄다고 했다. 의대 정원 증원 정책의 합법성과 공익성을  법원에서도 인정한 것이다.

정부는 정책의 결과에 책임을 진다. 정책을 결정할 권한을 갖고 있으니 당연히 책임도 지는 것이다. 정책의 잘못이 드러나면 국무총리나 장관들이 국회에 불려나가 추궁을 받고 질책을 당한다. 정부가 대국민 사과를 하게 될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는 선거에서 심판받는다. 국회의원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서 심판받고,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해 정권을 잃게도 된다.

그러나 이익단체는 다르다. 극렬한 반대로 정부 정책을 무산시켜 국민에게 피해를 준다고 해도 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책임을 물을 방법도 없다. 1998년 마지막으로 늘어난 의대 정원은 2000년 의약 분업 사태를 거치면서 논의 끝에 2006년 감축이 결정됐고 그 이후 19년간 동결됐다. 2010년대 들어 급속한 고령화로 의사 부족론이 나와 이명박·문재인 정부가 의대 정원 증원을 시도했지만 의사 단체의 반발과 집단 행동으로 증원은 번번이 무산됐다. 지난 27년 동안 정부는 의대 정원을 한 명도 늘리지 못했다. 그 결과가 오늘의 의사 부족 사태이다. 그렇지만  의사 단체들은 의대 정원 증원 무산으로 빚어진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모든 책임은 정부에 돌아갈 뿐이다.

중대한 기로에 선 우리 사회

어떤 단체이든 주장만 하고 책임은 지지 않는다면 정부 정책 결정 과정에 관여하고 개입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 그 단체의 의견과 이해관계가 최대한 반영되도록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고 여론전을 펴는 선에 그쳐야 한다. 그 정도를 넘어 정책을 무산시키려 한다면 민주 정치 원리와 국가의 역할을 부정하는 일이나 같다. 결과에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자기 이익만 주장하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1970년대  탄광 노조의 불법 파업을 끝장낸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탄광 노조는 전국 주요 탄광을 점거하고 불법 파업을 일삼았다. 어느 정부도 탄광 노조에 맞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정부보다 탄광 노조 힘이 더 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대처 총리는 이런 탄광 노조에 분연히 맞섰다. 불법 파업을 벌이는 탄광 노조와 무려 1년을 대치한 끝에 탄광 노조 측에서 백기 항복을 받아냈다. 그때 대처 총리가 한 말이 있다. “누가 영국을 통치하는가. 정부인가, 탄광 노조인가?” 지금까지는 탄광 노조가 지배했지만 이제는 다를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 말이었다. 대처의 의지대로 영국에서 탄광 노조는 완전히 힘을 잃었다. 탄광 노조뿐 아니라 노조 전체가 비슷한 처지가 됐다. 그 결과 노조 천국, 파업 천국이라는 ‘영국병’이 사라졌다. 노조가 지배하는 비정상 국가에서 정부가 지배하는 정상 국가로 돌아왔다.

정책 결정의 최종 권한과 책임에서 어떤 단체도 정부보다 위에 설 수 없다. 정부가 잘나고 예뻐서가 아니다. 국민이 정부에 그런 권한과 책임을 위임했기 때문이다. 의대 정원 증원 문제도 이 원리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의대 정원 증원을 막으려는 의사 집단 행동이 3개월째 계속되는 우리 사회는 갈림길에 서 있다. 정부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느냐, 의사 단체 같은 힘 센 단체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느냐의 갈림길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정치학과ㆍ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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