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아닙니다, 비누 작품입니다
'신화장구지' 전시장에 놓인 페인팅 시리즈 작품 옆에 신미경 작가가 서 있다. 비누로 만든 그림이다. /아트조선 스페이스
갈색 빛깔 은은한 도자기, 그리스 여신을 빚은 대리석 조각상, 파스텔톤 추상화가 한 공간에 놓였다. 실은 도자기도, 대리석도, 추상화도 아니다. 모두 신미경(57) 작가의 손에서 탄생한 비누 작품이다.
‘비누 조각가’ 신미경의 작품 30여 점이 서울 광화문 아트조선스페이스에 펼쳐졌다. 14일 개막한 제2회 하인두예술상 수상 기념전 ‘신화장구지(新花長舊枝)’다. 전시 제목 ‘신화장구지’는 금강경 야부송의 한 구절로, ‘새 꽃은 옛 가지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서양의 대리석이나 동양 불상, 도자기 등 견고한 유물들을 무르고 연약한 비누로 재현해온 신미경의 작품 세계를 함축하는 문장이다. 작가는 “어릴 때부터 유물이 가진 유일무이한 값어치에 대해서 궁금했다. 그런데 유물을 만든 그 옛날 제작자 입장에서 보면, 처음부터 의도하고 유물을 만든 게 아니라 동시대 작품이 세월이 흘러 유물이 되어 있는 것”이라며 “시간이 정지하는 유물을 현대미술로 재현해 과거와 현재 사이를 어떻게 읽어내는지 의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했다.
갈색 도자기를 비누로 재현한 ‘고스트 시리즈’ 뒤에 선 신미경 작가. /아트조선스페이스
전시장은 향기로 가득 차 있다. 비누에 각종 향료를 넣어 작품마다 다른 향을 내뿜는다. 통창 앞에는 갈색 도자기를 비누로 재현한 ‘고스트 시리즈’ 16점이 유물 운반용 목재 크레이트에 놓였다. 유리처럼 매끈한 표면은 수차례 실험 끝에 얻어낸 결과물이다. 작가는 “도자기 형태의 작품을 처음 비누로 만들었을 때 속까지 비누로 차있으면 도자기처럼 보이지 않았다. 형태를 완성한 후 안을 파냈더니 얇은 유리처럼 보인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추상화를 닮은 ‘라지 페인팅(Large painting)’ 연작이 전시장 입구와 메인을 차지했다. 이름이 페인팅이지만 엄연한 비누 조각이다. 비누를 200㎏ 가까이 녹인 다음 큰 틀에 한꺼번에 부어서 굳히는 작업이다. 서로 다른 색의 비누와 향이 섞이면서 한 점의 ‘회화’가 탄생했고, 토치(torch)로 표면을 녹이고 마무리했다. 작가는 “관람객들에겐 정적인 추상화처럼 보이겠지만 만드는 과정은 굉장히 역동적”이라며 “그러한 간극이 제게는 굉장히 흥미롭다”고 했다.
전시장 화장실 세면대에 놓인 ‘그리스 조각상’도 비누다. 손을 씻을 때 얼마든지 문질러도 된다. 전시가 끝날 무렵에는 닳아 형태가 뭉개진 이 조각상 역시 시간을 품은 유물이 된다. 7월 13일까지. 일·월요일 휴관. 무료 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