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현지시각) 이탈리아 로마의 의사당 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 참석자들이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를 추모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러시아 대표적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47)의 옥중 돌연사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철권 통치 강화를 의미한다는 어두운 해석이 나온다. 미국과 영국, 유럽연합(EU) 등은 대 러시아 추가 제재를 추진하고, 나발니의 부인 율리아 나발나야는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다짐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19일 “러시아 당국이 ‘ 화학적 검사를 위해 나발니의 주검을 최소 14일 동안 가족에게 인도할 수 없다고 유족에게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당국은 나발니의 정확한 사망 원인이 나오기도 전에 그가 혈전증이나 돌연사 증후군 등으로 숨졌다는 식의 정보를 국영 언론사 등을 통해 흘려 왔다. 이날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대통령실) 대변인은 “조사가 진행 중이고, 더 말할 게 없다”고 말을 아꼈다.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시베리아 제3교도소(IK-3)에서 나발니가 돌연사한 데 푸틴 정권이 개입했는지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머니가 시베리아로 찾아가서도 주검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의혹이 커지고 있다.
나발니의 아내 율리아 나발나야는 이날 당국의 ‘14일간 사인 검사 방침’에 대해 “2020년 신경작용 독극물 ‘노비촉’ 테러 때처럼 (독극물의) 흔적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발나야는 “그는 푸틴에 의해 살해됐다. 그가 하던 일을 계속하며, 우리나라를 위해 싸울 것”이라고 다짐했다.
나발니는 지난 2020년 8월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독극물 의심 증세로 쓰려져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다. 당시 나발니는 독일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독일 정부가 나발니의 몸에서 노비촉이 사용됐다는 증거가 나왔다고 밝혔다. 영국 탐사보도 매체 벨링켓 등이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이 나발니 독살을 시도했다는 보도를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번 나발니 죽음에도 러시아 당국 개입을 의심하는 눈길이 많다. 러시아 독립 언론 노바야 가제타의 편집장으로 2021년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인 드미트리 무라토프는 나발니가 고문을 당했다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나발니의 죽음이 세계 지도자와 러시아 시민들을 슬픔에 빠트렸지만, 푸틴에 대항할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는 이미 사라졌다”고 분석했다. 나발니는 지난 2011년 반부패재단을 세워 푸틴 정권의 부패를 고발하는 활동을 해왔다. 미국 뉴스위크는 “푸틴을 비판할 이가 ‘멸종에 가까워진’ 포스트-나발니 시대가 됐다”고 묘사했다.
1999년 12월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집권을 시작한 푸틴 대통령의 치하에서 비판의 싹은 제거되어 왔다. 러시아는 지난 2012년부터 외국의 자금 지원을 받는 비정부기구·언론 등을 ‘외국 대행 기관’으로 지정해 활동을 제한하고, 2021년 12월 러시아 법원은 이 법에 근거해 대표적인 인권단체 ‘메모리알’ 해산 명령을 내렸다. 다음달 열리는 대선에서 푸틴 대통령 5선은 확실시된다. 푸틴 대통령이 2030년까지 임기를 채우면,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29년 집권 기록을 뛰어넘는다. 대선을 앞두고 나발니 사망 사건 보도는 러시아 언론에서 급속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러시아 정부가 기만의 독재에서 공포의 독재로 변화했고, 특히 우크라이나 침공 뒤 ‘20세기 소련의 철권통치’ 때와 유사한 노골적 공포 독재로 바뀌고 있다”고 풀이했다.
국제 사회는 러시아의 이같은 움직임을 우려하며 추가 제재 움직임이 나온다. 스테판 세주르네 프랑스 외교부 장관은 나발니의 죽음과 관련해 “푸틴 정권이 다시 민낯을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영국, 독일, 핀란드, 스웨덴, 네덜란드 등 다른 유럽 주요국들도 자국 주재 러시아 대사를 초치해 “나발니의 죽음에 대한 투명한 조사”를 요구했다. 또 미국과 유럽연합은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홍석재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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