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받은 윤, 이제 ‘민주당 탓’ 불가능…남은 선택 3가지 있다

심판받은 윤, 이제 ‘민주당 탓’ 불가능…남은 선택 3가지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연합뉴스

4·10 총선 뒤 윤석열 대통령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영수회담을 제의한 건 4월19일 금요일 오후였습니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의 발표 내용은 이랬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오늘 오후 3시30분에 이재명 대표와 통화를 했습니다. 대통령은 먼저 이재명 대표의 당선을 축하하고 아울러 민주당 후보들의 국회의원 당선을 축하했습니다. 이 대표에게 ‘다음주에 형편이 된다면 용산에서 만나자’고 제안했습니다. 대통령은 ‘일단 만나서 소통을 시작하고 앞으로는 자주 만나 차도 마시고 식사도 하고 또 통화도 하면서 국정을 논의하자’고 말했습니다. 이 대표는 초청에 감사의 뜻을 전하고 ‘대통령께서 마음 내주셔서 감사드린다’고도 말했습니다. 이 대표는 또 ‘저희가 대통령께서 하시는 일에 도움이 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심판받은 윤, 이제 ‘민주당 탓’ 불가능…남은 선택 3가지 있다

뭔가 좀 이상했습니다. 이재명 대표가 했다는 ‘대통령께서 마음 내주셔서 감사드린다’는 말과, ‘저희가 대통령께서 하시는 일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말이 걸렸습니다. 민주당 쪽에 물어봤습니다. “이재명 대표가 의례적으로 한 말을 그런 식으로 공개해서 불쾌하지만, 판을 깰 수는 없어서 그냥 있는 것”이라는 응답이 돌아왔습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과 천준호 민주당 당대표 비서실장이 지난 23일과 25일 두 차례 실무회담을 했지만, 의제도 일정도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2차 실무회담이 끝난 뒤 양쪽의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대통령실 의지 없네. ‘그냥 와서 말하라. 다 들어줄게.’ 이 스탠스다. 들어준다는 건 물론 억셉트(받아들임)가 아니라 리스닝(듣기)이다.”(민주당 관계자)

“윤석열 대통령은 무슨 이야기든 들을 수 있다는 입장을 이미 밝히신 바 있다. 이재명 대표도 총선에서 나타난 민심을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마찬가지 입장을 피력하신 바 있다. 이는 만나서 형식과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국정 전반에 대해 폭넓고 다양한 대화를 해달라는 국민 여론과 일치하는 것이다.”(홍철호 정무수석)

영수회담 결렬 위기까지 간 것입니다. 이번 영수회담에 대한 윤 대통령과 이 대표의 생각은 처음부터 달랐던 것 같습니다.

지지율 23% 나온 뒤 회담 제안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전화를 건 4월19일은 4·19 혁명 기념일이었습니다. 윤 대통령은 오전 8시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 대통령실 참모, 유족 대표들과 함께 4·19 묘지를 따로 참배했습니다. 오전 10시 기념식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 대표,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와의 만남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날 오전 10시 한국갤럽이 정례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윤 대통령 직무 긍정 평가가 취임 이후 최저치인 23%로 추락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총선 직후 이관섭 비서실장이 전한 윤 대통령의 ‘영혼 없는 사과’, 4월16일 국무회의에서 “국정 방향은 옳다”고 한 ‘소신 발언’의 여파였습니다.

심판받은 윤, 이제 ‘민주당 탓’ 불가능…남은 선택 3가지 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이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혹시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 영수회담을 제의했던 것은 아닐까요? 영수회담 제의 자체가 지지율 방어용 아니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윤 대통령에게는 영수회담의 내용보다 영수회담 그 자체가 중요할 것입니다. 이 대표와 만나서 악수하고 대화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영수회담의 목적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 대표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이번 총선 결과는 윤석열 정권의 참패이자 민주당의 압승이었습니다. 이 대표와 민주당의 위상이 정국의 중심축으로 격상됐습니다. 이 대표의 일거수일투족에 국민의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대표로서는 영수회담에서 뭔가 의미 있는 성과를 내야 합니다. 그냥 만나서 서로 할 말만 하는 영수회담이라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무조건 만나서 뭐든지 얘기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일종의 ‘배 째라’ 작전입니다. 결국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양보했습니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4·10 총선 민심을 ‘협치’가 아니라 ‘책임’으로 해석하는 의견도 터져 나왔습니다. 전략기획위원장에 새로 임명된 민형배 의원은 “협치라는 말을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협치를 대여 관계의 원리로 삼는 건 총선 압승이란 민심을 배반하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민 의원의 노선에 의하면 이번 영수회담을 깨야 합니다.

DJ “여소야대, 독주·독선 설 자리 없어”

그러나 선거 이후에도 민주당이 대통령과 싸움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영수회담을 해야 합니다. 국정에 협력하는 것이 옳습니다. 민생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국민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영수회담은 민심의 격렬한 분출을 여야의 정치 지도자들이 담아 안아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안입니다.

역사가 그렇습니다. 유신 독재가 깊어가던 1975년 5월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영수회담을 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김영삼 총재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김 총재, 나 욕심 없습니다. 집사람은 공산당 총 맞아 죽고, 이런 절간 같은 데서 오래 할 생각 없습니다. 민주주의 하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 의원 석방, 동아일보 광고 정상화 등 김영삼 총재의 몇 가지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약속은 결국 지키지 않았지만, 영수회담으로 고비를 넘긴 것입니다.

1987년 6월 항쟁 와중인 6월24일 전두환 대통령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영수회담이 열렸습니다. 김영삼 총재는 4·13 호헌 조치 철폐와 대통령직선제 수용을 요구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개헌 논의를 재개하겠다고만 했습니다. 김영삼 총재는 영수회담 결렬을 선언했습니다. 5일 뒤인 6월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6·29 선언’이 나왔습니다. 결과적으로 김영삼 총재의 요구를 전두환 대통령이 받아들인 것입니다.

1996년 12월 김영삼 정부는 ‘노동법 날치기’로 정권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1997년 1월21일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 이홍구 신한국당 대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여야 영수회담을 열었습니다. 그 뒤 여야는 2~3월 임시국회에서 야당의 요구대로 노동관계법을 재개정했습니다. 영수회담으로 파국을 막은 것입니다. 이처럼 영수회담은 정권과 국민, 여당과 야당의 정면충돌 상황에서 정국을 수습하는 매우 유효한 수단으로 활용됐습니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들의 대화 창구가 상설화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1988년 13대 총선으로 조성된 여소야대 정국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여야 대표들은 ‘5자 회담’에서 모든 현안을 다뤘습니다. 당시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 대통령은 뒷날 자서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여소야대 정국에서는 타협이 최선이었다. 타협이란 결국 절충과 양보였으니 독주와 독선은 설 자리가 없었다.”

“여소야대 정국이라 해서 야당이 독주하는 것은 아니다. 야당은 철저히 국민의 뜻을 헤아려야 했다. 국정의 책임을 공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판받은 윤, 이제 ‘민주당 탓’ 불가능…남은 선택 3가지 있다

마치 김대중 대통령이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와 윤 대통령과 이 대표에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자신도 집권 뒤 여소야대 환경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했습니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일곱 차례 영수회담을 했습니다. ‘총재 회담’이라고도 했습니다. 아예 2개월에 한번씩 정례화하기로 합의가 이뤄지기도 했지만, 2001년 1월이 마지막 회담이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의 ‘5자 회담’과 김대중 대통령의 일곱 차례 영수회담은 여소야대 정국에서 협치의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판받고도 ‘야당 탓’ 할 건가

문재인 대통령도 야당과 매우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대화했습니다. 취임 직후부터 여야 대표나 원내대표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정책 협의를 하고 외교 성과를 설명했습니다. 남북정상회담, 일본의 수출 규제, 코로나 등 현안이 있을 때마다 여야 대표나 원내대표들을 만났습니다. 대통령과 여야 5당 원내대표의 여·야·정 국정 상설협의체를 만들어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자유한국당의 반대로 회의가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이처럼 역대 대통령들은 예외 없이 영수회담이나 여야 대표 회담을 자주 열었습니다. 야당 대표를 국정의 동반자로 예우했습니다. 취임 이후 야당 대표와 단 한 차례도 회담하지 않은 윤 대통령이 비정상인 것입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윤 대통령에게 4·10 22대 총선 이전과 이후는 전혀 다른 정치 환경입니다. 총선 이전에는 국정 무능과 난맥을 ‘야당 탓’으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총선 이후에는 ‘야당 탓’이 불가능합니다. 국민이 야당이 아니라 정권을 심판했기 때문입니다. 영수회담 이후 윤 대통령의 선택지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식물 대통령으로 남은 임기를 버티는 길입니다. 국정 마비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입게 됩니다.

둘째, 국회에 의해 탄핵 소추되고, 헌법재판소에 의해 탄핵당하는 길입니다. 윤 대통령 자신이나 국민 모두에게 불행한 일입니다.

셋째, 야당을 국정의 동반자로 인정하고 협치를 제도화하는 길입니다. 대연정이든, 동거 정부든, 거국 내각이든 이름은 뭐라고 붙여도 좋습니다. 이 길이 윤 대통령이나 국민 모두에게 최선의 시나리오입니다.

여기에 임기 1년을 단축해 4년 중임제를 도입하고 대통령 권력을 분산하는 개헌을 주도하면 윤 대통령은 7공화국을 활짝 연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부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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