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발니의 옥중편지…"우리도 한국처럼 민주주의 가능"

[프랑크푸르트=AP/뉴시스] 지난 17일(현지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 러시아 영사관 앞에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47)의 죽음을 애도하는 촛불과 사진이 놓여져 있다. 2024.02.20.

북극권 시베리아 교도소에서 돌연사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 알렉세이 나발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한 한국을 직접 언급하며 “그들이 했다면 우리라고 못 할 것 없다”면서 굳건한 저항 의지를 보여줬다.

◆전자 편지로 외부와 소통…법정은 ‘체제 비판’ 연설장

뉴욕타임스(NYT)는 19일(현지시간) 나발니가 사망 전 마지막 몇 달간 지인들에게 보낸 자필 편지 발췌본을 공개, 나발니가 건강한 자존감과 자기 확신을 갖고 외부와 소통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고 보도했다.

나발니는 2021년 1월 시작된 수감생활을 “우주 항해”라고 불렀다. 지난해 7월 한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경험해 보지 않으면 러시아 감옥 생활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굳이 경험해 볼 필요도 없다”며 혹독한 수감 환경을 유머 섞어 전했다.

수감 생활은 나발니의 신체엔 타격을 입혔을지언정, 맑은 정신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무기수에 가까운 처지였지만, 나발니는 자신의 미래를 체계적으로 설계했다. 1년에 영어로 쓰인 책 44권을 읽었으며, 자신의 의제를 다듬었다. 정치 회고록을 연구하고 언론인들과 논쟁하는 한편, 측근들이 보내준 누리소통망(SNS) 게시물에 댓글도 달았다.

친구인 러시아 사진작가 예브게니 펠드만에겐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선거 공약이 “정말 공포스럽다”며, 조 바이든 대통령의 건강이 악화하면 트럼프가 재선할 것을 우려했다.

지난해 9월 도착한 편지에는 한국과 대만도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했다며, 러시아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나발니가 편지를 보낼 수 있었던 건 교도소 시스템 디지털화 덕분이다. 한쪽당 500원가량 내면 웹사이트로 편지를 보낼 수 있고, 보통 1~2주간 검열 뒤 답장을 스캔 형태로 받을 수 있다.

[카르프=AP/뉴시스] 러시아 연방교도소가 공개한 영상에서 알렉세이 나발니가 지난 15일(현지시간) 야말로네츠크 하프의 교도소에서 웃으며 농담하는 모습. 2024.02.20.

접견 온 변호사를 통해 외부와 소통하기도 했다. 밀폐된 접견실에서 서류 전달이 불가능해 보통 변호사들이 창문 너머로 서류를 들어 보여줬다. 이마저도 2022년 교도관들이 창문을 포일로 가리면서 불가능해진 것으로 전해진다.

재판은 나발니에게 일종의 오락이었다. 나발니는 “공판은 주의를 분산시키고 시간을 더 빨리 지나가게 해준다”며 “날 흥분시키고 투쟁하는 느낌을 준다”고 표현했다.

푸틴 체제 비판을 할 수 있는 장이기도 했다. 나발니는 지난해 7월 징역 19년형을 선고받은 뒤 판사 등에게 “미쳤다”고 말했다. 나발니 팀이 공개한 연설문에 따르면 “신이 주신 인생이 하나밖에 없는데 이렇게 쓰라는 거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지난달 화상으로 진행된 마지막 심리에선 “끓는 물 두 잔과 역겨운 빵 두 조각을 먹을 수 있는 식사 시간을 연장해 달라”며 비꼬기도 했다. 요청은 물론 거절됐다.

대신 나발니는 측근들이 먹는 음식을 통해 대리 만족했다. 한 지인에겐 베를린에선 팔라펠보다 케밥을 먹는 게 낫다고 했으며, 펠드만이 뉴욕에서 맛본 인도 음식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베오그라드=AP/뉴시스] 지난 16일(현지시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주재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한 여성이

◆수감 생활 원동력은 책…솔제니친 소설 다시 봐

수감 생활을 대부분은 책과 함께 보냈다. 지난해 4월 편지에선 책 10권을 동시에 보고 있다고 전했으며, 이전엔 경멸했던 회고록을 좋아하게 됐다고도 했다.

스탈린 시대 수용소를 다룬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다시 읽었으며, 단식 투쟁 후 몇 달 동안 허기에 시달리면서 소련 시대 노동 수용소의 부패를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교도소에서 약 300일 동안 독방 처분을 받았던 나발니는 기간보다 지참할 수 있는 책 권수로 불만을 제기했다. 독방에는 한 권만 허용됐지만, 나발니는 10권은 가져가게 해달라고 항의했다.

지인들에게 책을 추천하기도 했는데, 지난해 7월 편지에서 1980년대 소련 반체제 인사 아나톨리 마르첸코의 1012쪽 분량 3부작을 포함한 책 9권을 권했다.

나발니는 네덜란드로 망명한 러시아 진보 언론인 미하일 피쉬만과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 평가를 두고 논쟁하기도 했으며, 미국 로버트 F. 케네디의 딸 케리 케네디와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나발니는 케네디에게 “아버지 관련 책을 읽다가 두세 번 울었다”고 했으며, 로버트 케네디의 ‘희망의 물결은 수백만 개로 퍼져 억압과 저항의 벽을 무너트린다’는 유명 문구가 적힌 포스터를 보내준 데 감사를 표했다. 언젠가 사무실 벽에 포스터를 걸 수 있길 희망한다고도 했다.

지난해 10월 사망한 미국 인기 드라마 ‘프렌즈’ 배우 매슈 페리의 부고를 보고 감동받았다고도 했으며, 가자지구 전쟁과 반유대주의에 대한 생각도 편지로 나눴다.

[모스크바=AP/뉴시스] 사진은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가 지난해 10월 러시아 모스크바 법정에서 발언하는 모습. 2023.07.21. *재판매 및 DB 금지

◆사망 3일 전 마지막 편지…북극 교도소 이감 길에도 독서

나발니는 지난해 12월 돌연 소재가 묘연해진 뒤, 같은달 25일 러시아 최북단 시베리아 야말로네네츠 자치구 제3교도소로 이감된 사실이 알려졌다.

다음날 나발니는 변호사를 통해 SNS에 “난 당신의 새로운 산타”라며 “이곳은 밤이 지나면 저녁이 되고 다시 밤이 되는 곳”이라고 유머 섞어 전했다. 이감되는 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마지막 편지는 사망 3일 전인 지난 13일 도착했다. 새로운 교도소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이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의 고전뿐이라는 내용이었다. 야말로네네츠 교도소가 전자 편지 서비스를 허용하지 않아 수필 편지 형태로 전해졌다.

러시아 교정당국은 지난 16일 나발니가 산책 후 돌연사했다고 발표했다.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푸틴 대통령은 나흘째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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