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국빈 방문 중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운데)가 11일(현지시각) 워싱턴 연방하원 본회의장에서 연설을 하던 중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왼쪽)과 마이크 존슨 미국 하원의장이 박수를 치고 있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미국을 국빈방문 중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1일(현지시각) 미국 상·하원 합동 회의 연설에서 과거 침략 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은커녕 관련 내용을 아예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역사 수정주의’로 비판을 받았던 아베 신조 전 총리의 9년 전 연설보다도 후퇴한 모습이다.
기시다 총리는 이날 워싱턴 연방하원 본회의장에서 ‘미래를 향한 우리의 글로벌 파트너십’이라는 제목으로 34분간 영어 연설을 했다. 미국을 방문하는 외국 지도자들에 대한 최고의 예우인 상·하원 합동 회의 연설은 일본 총리 중엔 2015년 4월 아베 전 총리 이후 두번째였다.
기시다 총리는 긴 연설에서 과거 일본의 침략 전쟁과 식민지배 등 역사적 과오에 대해선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는 어린 시절 미국 유학부터 중국·북한·러시아 비판, 미-일 동맹, 미국 경제를 위한 일본의 노력 등만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중국을 직접 언급하면서는 “대외적인 자세나 군사 동향은 일본의 평화와 안전뿐만 아니라 국제사회 전체의 평화·안정에 있어 지금까지 없었던 최대의 전략적인 도전”이라고 비판했다. 북한에 대해서는 “핵미사일 프로그램이 직접적인 위협”이라고 지적했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연결시켜 “내일의 동아시아일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기시다 총리는 그러면서 “미국이 혼자 국제질서를 지키도록 강요받을 이유가 없다. ‘도모다치’(친구)로서 일본 국민은 미국과 함께 있다”고 밝혔다. 기시다 총리는 “미·일 파트너십은 양국에만 그치지 않는다”며 한국·오스트레일리아·인도·필리핀 등을 거론하고 다자간 협력을 강조했다.
이번 연설은 일본군 ‘위안부’ 등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 ‘역사 수정주의’로 비판받던 아베 전 총리 연설보다도 퇴행적이란 평가를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2015년 4월 미국을 국빈방문한 아베 총리는 미 의회 연설에서 “전후 일본은 지난 대전(2차 세계대전)에 대한 깊은 반성을 마음에 담고 우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우리 행동이 아시아 여러 나라 국민에게 고통을 안긴 사실로부터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한-일 관계 쟁점이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과거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분명한 반성도 담기지 않아 비판받았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외교부 대변인 명의로 성명을 내어 “아베 총리의 미 의회 연설이 올바른 역사 인식을 통해 주변국들과 참된 화해·협력을 이룰 수 있는 전환점이 될 수 있었는데도, 그런 인식도 진정한 사과도 없었음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윤석열 정부는 그때보다 더 심각한 인식이 담긴 이번 연설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기시다 총리의 연설은 일본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더는 과거사 문제를 언급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일본의 반성을 지속해서 촉구했던 한국에서 윤 대통령 취임 뒤 이런 요구가 사라진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3월 한-일 관계 최대 쟁점인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과 관련해 대법원에서 패소한 일본 기업 대신 한국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돈을 내는 ‘제3자 변제’ 방안을 발표한 뒤 밀어붙이고 있다. 윤 대통령은 취임 뒤 3·1절 기념사나 광복절 경축사 등에서도 일본의 역사 반성을 전혀 요구하지 않고 있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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