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미 대학가 텐트 농성…“가자 고통에 비하면 체포가 대수냐”

[현장] 미 대학가 텐트 농성…“가자 고통에 비하면 체포가 대수냐”

23일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 광장 천막 농성장에서 참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반유대주의라니요? 저 유대인이에요. 여기 이 친구도 유대인이에요.”

23일 오후(현지시각), 뉴욕 맨해튼의 컬럼비아대 잔디 광장에 설치된 천막 농성장에서 만난 한 학생은 ‘이런 행동에 반유대주의라는 비판도 나온다’는 기자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항변했다. 이름을 아리라고만 밝힌 학생은 “여기 왔다 갔다 하는 유대인이 200명은 된다”고 했다. 그는 체포나 정학을 당할까 봐 걱정되지 않냐고 하자 “가자지구 사람들이 집단 학살에 직면한 상황에 비하면 우리가 정학당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지난 17일 농성 시작에 이어 이튿날 학생 100여명이 연행돼 미국 대학생들의 저항 운동의 진앙이 된 컬럼비아대 캠퍼스 안팎은 삼엄하고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쇠줄로 묶어 잠근 정문에는 경찰이 깔렸고, 외부인 출입은 금지된 채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쪽문으로 드나들었다.

“대학은 집단학살 덕에 돈 번 기업 투자 회수하라”

컬럼비아대는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며 전날 원격 수업 전환을 발표했다. 기자들은 오후 2~4시에만 캠퍼스 진입이 허용됐다. 교직원이 신분증을 확인하고 이름과 매체명을 적은 뒤 들여보냈다. 학교에서 강의가 중단됐는데도 캠퍼스로 향하던 한 남성은 경제학 강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서 왔다”며 “난 학생들의 행동을 지지한다”고 했다.

텐트 30여개가 설치되고 펜스를 두른 농성장에서는 참가자들이 토론하거나 먹거리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동참한 교직원들인 듯 어린 자녀들과 함께 물감 묻힌 붓으로 종이에 구호를 쓰는 이들도 있었다. 햇볕을 쬐던 학생은 잘 때 춥지 않냐는 질문에 “엄청 춥다”고 했다. 농성 참가자들은 학교의 대 언론 개방 시간에 맞춰 말솜씨 좋은 학생들을 내세워 주장을 알렸다. 학생들은 컬럼비아대가 이스라엘의 “집단 학살이나 팔레스타인 땅 점령” 덕에 돈을 버는 기업들에 대한 투자를 회수하라는 등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농성장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현장] 미 대학가 텐트 농성…“가자 고통에 비하면 체포가 대수냐”

한 컬럼비아대 학생이 천막 농성장 근처에 하마스한테 납치당한 이스라엘인들 사진을 붙이고 있다.

이들에게 반대하는 몇몇 학생들의 활동도 눈에 띄었다. 근처에 있는 벽에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한테 납치당한 이스라엘인들의 사진을 붙이던 학생은 농성장 쪽을 바라보며 “큰 그림을 못 보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우선 하마스가 인질들을 풀어주고 가자지구 재건에 나서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미 정부, 이스라엘에 돈·무기 지원 중단해야”

역시 맨해튼에 있는 뉴욕대는 건물마다 경비원들이 신분을 확인하며 출입을 까다롭게 통제하고 있었다. 전날 밤 경찰은 학교의 요청으로 이 학교 굴드 광장에서 시위하던 133명을 체포했다. 23일에 찾은 광장에서는 아예 학생들의 진입을 막으려는 듯 나무판으로 벽을 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뉴욕대의 원천 봉쇄에 따라 학생들과 시민들은 길 건너 공원에서 집회를 열었다. 전단지를 나눠주던 시민은 “우리 목소리가 퍼지는 게 두려우니까 학생들을 잡아간 것”이라고 했다. 뉴욕대 학생 제스 아이컨은 “조 바이든 행정부는 이스라엘에 돈이나 무기를 주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역겹다”고 했다.

[현장] 미 대학가 텐트 농성…“가자 고통에 비하면 체포가 대수냐”

뉴욕대 학생들이 학교 쪽이 교내 집회를 불허하자 근처 공원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예일대·미시간대·MIT에도 천막 친 학생들

저항은 이제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전날 예일대에서도 60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같은 날 미시간대·에머슨대·터프츠대·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도 천막 농성이 시작됐다. 뉴멕시코대 학생들도 23일 연이틀 시위에 나섰다. 미네소타대에서는 천막 농성을 시작한 9명이 체포됐다.

이런 상황에서 각 대학들은 학생들의 움직임에 어떻게 대응할지 갈팡질팡하고 있다. 정치권이나 유대계 후원자들은 반유대주의 세력을 단호하게 눌러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러나 반유대주의와 별개인 ‘학살 중단’ 요구를 억압하는 것은 다른 곳도 아닌 대학이 표현의 자유를 부정하는 행태라는 지적도 많다. 컬럼비아대와 마주보고 있는 자매 대학인 버나드대는 천막 농성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학생들에게 정학 처분을 내리면서 학교 건물 출입까지 금지했다. 뉴욕시민자유연합의 도나 리버먼 사무총장은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을 반유대주의와 동일시”하면서 정치적 반대 의견을 누르는 것은 부당하다고 에이피(AP) 통신에 말했다.

[현장] 미 대학가 텐트 농성…“가자 고통에 비하면 체포가 대수냐”

전날 밤 학생 등 133명이 체포당한 뉴욕대 굴드 광장에 학생들이 다시 집결하는 것을 막으려는듯 나무판으로 된 벽이 급조되고 있다.

하지만 네마트 샤피크 컬럼비아대 총장은 이날 밤, 농성 참가자들이 자정까지 해산하지 않으면 “대안을 고려하겠다”며 또다시 경찰을 투입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지난 17일 하원 청문회에서 반유대주의에 강하게 대응하라는 질책을 받고 이튿날 경찰을 학교에 불러들인 그는 공화당 의원들에게 여전히 무르다는 이유로 사임 압박을 받고 있다.

그런데 컬럼비아대 교수회는 샤피크 총장이 경찰을 불러 학생들을 진압했다는 이유로 불신임을 추진하고 있다. 컬럼비아대 학생들을 무더기로 체포한 게 다른 대학 학생들을 자극했다는 점에서 ‘2차 진압’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예측이 어려워 보인다.

뉴욕/글·사진 이본영 특파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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