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열사 부당지원 및 횡령·배임 의혹을 받는 조현범 한국앤컴퍼니그룹 회장이 자넌 1월11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완독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도입부의 이 구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톨스토이가 한국의 재벌을 알고 있었다면 그는 이 구절을 다음처럼 고쳐썼을 것이다. “흙수저의 삶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지만 재벌일가의 삶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다. 바로 그의 부모가 재벌이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할 이야기는 재벌총수 일가로 태어난 우연에서 비롯된 특권과 즐거움에 대한 것이다. 이들은 책임지지 않으면서도 너무 편하고 쉽게 많은 돈을 번다.
■ 너무 편하고 쉽게
현재 우리나라의 재벌그룹 총수들은 대부분 창업주가 아니라 그 3∼4세이다. 이들은 총수에 오르기까지 엇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국외 명문 사립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한 뒤에 아버지 회사에 입사한다. 중간에 MBA 과정을 밟거나 외국계 회사에서 경력을 쌓기도 한다(물론 이 경력은 그들에게 큰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그러고는 30살 전후에 연어처럼 부모 회사로 돌아가 경영 승계 ‘명목’의 훈련을 받는다. 승계 수업이라고 말했지만, 이는 기존 임원들 중에 선발된 최고경영자(CEO) 후보들을 장기적 시각에서 단련시키는 국외 기업의 경영승계 프로그램과는 거리가 멀다. 답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재벌 3~4세들이 그룹 계열사에 입사한 뒤 임원이 되는 데까지 채 7년도 걸리지 않는다. 고속승진이 일반화돼 있다. 대졸 신입사원이 임원이 되기까지 걸리는 평균 연수는 약 22년이다. 총수의 하루는 일반인의 3일인 셈이다.
너무 편하게 보수를 받는 극단적 사례는 조현범 한국타이어 회장이다. 그는 작년 두 개의 계열사의 이사로 있으면서 78억원이 넘는 금액을 보수로 받았다. 액수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그가 작년에 9개월 동안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되어 이사로서의 정상적인 직무수행이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재벌총수에게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은 적용되지 않는다.
■ 높은 보수
이들은 돈을 많이 받는다. 아니 상당히 많다. 절대적 기준에서 이들의 보수는 근로소득 기준으로 상위 0.1% 이상이다. 임원들끼리만 놓고 비교해도 높다. 2014∼2018년 동안 우리나라 상위 100대 상장기업 중에서 가장 많은 보수를 받는 임원의 평균 급여를 계산해 봤다. 이들의 보수조차 그가 총수 일가의 구성원인지 아니면 전문경영인인지에 따라 차이가 매우 컸다. 전문경영인은 연평균 약 17억원을 받았지만, 재벌 총수(혹은 그 일가)는 약 28억원을 받았다. 평균적으로 65%나 더 많다. 다시 말해 특정 ‘성씨’를 갖고 있으면 더 높은 보수를 받는다. 나는 이것을 ‘핏줄 프리미엄’이라고 부른다.
프리미엄의 크기를 좀더 면밀하게 측정하기 위해 보수 수준에 영향을 준다고 알려진 기업의 성과, 직책, 그 기업이 속한 산업의 특성 등을 통제한 뒤 따졌다. 여전히 33∼80%의 핏줄 프리미엄이 존재했다(95% 신뢰구간). 이는 재벌 기업 내에서는 동일한 직위를 맡아도 재벌 총수의 노동이 전문경영인보다 33%에서 80%까지 더 높게 평가돼 보수에 반영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이러한 핏줄 프리미엄이 재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재벌 8곳을 선정해서 분석했다. 가장 높은 핏줄 프리미엄을 보인 곳은 씨제이(CJ)였다. 2014∼2018년 기간 동안 이들 지배주주 일가의 연평균 보수는 약 59억원으로, 이 중 핏줄 프리미엄 비중이 57%였다. 쉽게 말하면 만약 그가 전문경영인이었다면 그 보수는 25억원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반면 삼성의 핏줄 프리미엄은 0이었다. 삼성은 전문경영인의 보수가 높고, 총수였던 이건희 회장이 2014년부터 병원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최고 경영자의 높은 보수가 기업 가치 증대에 대한 정당한 보상인지, 아니면 그의 막강한 권력에서 나온 ‘경제적 지대’인지 논쟁이 뜨겁다. 핏줄 프리미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만약 재벌가에만 전해내려오는 경영의 비결이 있다면, 핏줄 프리미엄은 정당한 보수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재벌총수의 높은 보수는 지배의 사적 편익이거나 ‘지대’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 천문학적 배당 소득과 부의 축적
사실 보수는 그들이 누리는 경제적 소득의 일부에 불과하다. 재벌 총수 일가의 배당 소득 수준은 한국 사회의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재벌 총수 일가의 진정한 부는 배당 소득에서 나온다는 얘기다. 이 부를 바탕으로 경제적 권력이 정치적 권력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2014~2018년 사이 8개 주요 재벌 총수 일가가 받은 연평균 배당액은 약 952억원이다. 이는 같은 기간 이들 총수 일가의 연평균 보수 403억원의 두배를 웃돈다. 소비와 세금을 고려해도, 한 세대 동안 이들이 지속적으로 이러한 수준의 보수와 배당 소득을 얻는다면, 평균적으로 매 세대마다 대략 평균 3조5천억원 정도의 부를 축적하게 된다. 이는 지분 자체의 가치를 포함하지 않은 금액이다.
문제는 이러한 부의 축적 과정이 공정하지 않다는 데 있다. 재벌 총수 일가가 보유한 대부분의 지분은 부모로부터 (편법적으로) 상속받거나 혹은 ‘일감몰아주기’와 같은 방법으로 소수주주의 희생 위에 얻어진 것이다. 이는 핏줄 프리미엄이라는 문제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우리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다.
■ 무책임성
올해 신세계의 정용진 회장은 부회장에 오른 지 18년 만에 회장으로 승진했다. 그룹 쪽은 이는 “정 회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을 ‘정면돌파’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 회장이 부회장으로 재직 중이던 지난 5년간 신세계의 주가는 59% 하락했다. 특히 작년 한 해 동안 신세계의 주가는 20% 하락하면서 시장에서는 그의 오판과 무능이 큰 요인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정 회장의 모친인 이명희 총괄회장은 평소 인사에 있어 ‘신상필벌’을 강조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번 인사에는 그 원칙이 적용되지 않은 것 같다. 경영 실패의 책임은 전문경영인들이 감당한 반면, 오히려 정 회장은 영전했다. 그리고 신세계는 창사 이래로 최초 희망퇴직을 받는다. 무능은 재벌총수의 몫인데, 일자리를 잃는 것은 평범한 이들이다. 신세계 정용진 회장의 승진은 세습된 특권세력인 총수일가의 경영상의 무책임성이 낳은 문제가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자신의 가족만 빼놓고 모두에게 엄격한 재벌 총수. 이와 유사한 사례는 다른 재벌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에서 재벌 총수가 경영에 책임지는 경우는 그룹 자체가 몰락하여 강제로 축출되기 전까지는 드물다. 경영능력은 세습되지 않는다. 유능한 재벌총수에게도 무능한 후계자가 나올 수 있다는 얘기고, 그것이 자연스럽다.
문제는 무능함 자체보다 무능한 경영진이 책임을 지지 않는 철옹성의 재벌의 지배구조에 있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앞장서서 재벌 총수 일가에게 유리한 정책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 순자산 가치 대비 주가가 낮은 것이 지배주주의 무능이나 사익추구가 아니라 높은 상속세 때문이라며 세율을 손보려는 움직임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세상은 재벌에게는 멋진 신세계일지는 몰라도, 국민 대다수에게는 부조리한 세계다.
최한수 경북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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