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메이저리그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30·LA 다저스)의 전 통역사 미즈하라 잇페이의 불법 도박 및 불법 송금 스캔들은 미국 현지는 물론 전 세계 야구팬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이번 사건과 관련된 각종 보도가 쏟아졌고, “오타니 역시 공범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올 정도로 이번 스캔들은 미스터리 투성이었다.
이후 미 연방 검찰의 수사 결과로 오타니의 결백이 사실상 입증됐지만, 야구 팬과 언론 사이에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반응이 이어진다.
오타니와 전 통역사 미즈하라(왼쪽)/AFP연합뉴스
최근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스캔들을 수사한 미 연방검찰의 수사 결과 등을 통해, 스캔들의 전말을 알 수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했다. 오타니의 통역사였던 미즈하라는 통역사를 넘어 ‘야구 밖에 모르는’ 오타니의 생활 매니저이자 ‘실세’이기도 했다. 도박중독에 빠져 오타니의 돈을 야금야금 빼돌려 불법 도박을 하던 그는, 자신의 거짓말이 모두 드러난 순간에도 오타니에게 “내가 한 거짓말에 동참해달라”며 끝까지 매달렸다. 마지막까지 오타니를 회유해 죄를 면피하려 한 것이다.
이번 스캔들의 발단은 불법 스포츠도박 업자 수사였다. 미 사법당국이 불법 도박 업자(매튜 보이어)를 수사하던 중, 그의 계좌로 오타니 계좌에서 수십만달러가 입금된 내역을 확인했다. 미 현지 언론들은 이 수상한 이체 내역에 대해 취재하기 시작했다.
메이저리그 서울시리즈 1차전(LA 다저스 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이 열리기 하루 전인 지난달 19일, 서울에 있던 오타니의 에이전트에게 미 ESPN이 “왜 불법도박업자 계좌에 오타니 계좌에서 송금한 내역이 있는지 설명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진상을 알기 위해 오타니의 에이전트들이 미즈하라에게 “오타니에게 왜 이런 이체 내역이 있는지 물어봐달라”고 했는데, 이때부터 미즈하라의 거짓말이 시작됐다. 자신이 몰래 오타니의 계좌에서 돈을 빼낸 것을 은폐하기 위해 오타니에게 말을 전하지 않고 “사실은 오타니가 내 도박빚을 대신 갚아준 것”이라고 말을 지어내 에이전트와 소통 담당 대변인에게 전했다.
그날 ESPN과 직접 전화 통화로 인터뷰를 하는 와중에도 미즈하라는 “오타니가 내 사정을 알고 대신 빚을 갚아줬다” “오타니와 내가 오타니 계좌에서 돈을 나누어 송금했다” 등 자신의 잘못을 은폐할 거짓말을 이어갔다.
거짓말은 삽시간에 퍼졌다. “오타니가 통역사의 도박 빚을 대신 갚아줬다”는 미즈하라의 거짓말은 오타니 에이전트 뿐만 아니라 다저스 구단 관계자, 심지어 MLB 사무국에도 공유됐다. 파문이 크게 일거라 생각한 다저스 구단 수뇌부는 서울시리즈 1차전이 끝난 지난달 20일 오후 10시 무렵 클럽하우스 미팅을 열고 다저스 선수들을 모두 불러모은다. 다저스 수뇌부는 선수들에게 “곧 안좋은 보도가 나올 거 같다”고 말문을 연 뒤 미즈하라에게 소명할 기회를 준다.
이 자리에서도 미즈하라는 진실 반, 거짓 반이 섞인 기만적 언행을 이어갔다. “내가 도박 중독에 빠졌고, 막대한 빚이 생긴 걸 오타니가 대신 갚아줬다”며 자신으로 인해 곧 논란이 생길 것에 사과했다. 영어에 능숙하지 않은, 순진한 오타니는 돌연 미즈하라가 선수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달 15일 미국프로야구(MLB) 월드투어 서울시리즈를 참가차 오타니가 인천국제공항에 부인 다나카 마미코와 함께 입국하는 모습./뉴스1
진실의 순간이 다가왔다. 이상함을 느낀 오타니가 미즈하라와 에이전트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며 캐묻기 시작했고, 미즈하라는 ‘호텔에서 다 말하겠다’고 답했다.
20일에서 21일로 넘어가는 밤 12시 전후, 오타니와 미즈하라가 다저스 선수들이 묵는 호텔 지하에 있는 컨퍼런스룸에 오롯이 둘만 마주앉았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즈하라는 여기서 자신의 도박 행각과 오타니 계좌에서 몰래 돈을 빼낸 것, 그리고 이걸 은폐하기 위해 언론과 에이전트, 구단 관계자들에게 거짓말한 사실까지 모두 털어놨다.
그러면서 미즈하라는 오타니에게 매달렸다. 오타니에게 ‘내 거짓말에 너도 따라와주면 안되겠느냐. 네가 갚아 준 걸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도박 중독에 빠져 가족만큼 자신을 믿어준 오타니를 철저히 기만해놓고, 또다시 오타니에게 매달린 것이다.
만약 정에 끌려 이 요구를 승낙했다면, 오타니는 자칫 불법 도박 업자에게 송금한 혐의등으로 미 연방법을 위반한 공범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오타니는 이를 거절했고, 곧바로 에이전트인 네즈 발레로를 컨퍼런스룸으로 불러들인다.
그전까지 오타니와 소통할 때 늘 미즈하라의 말만 믿어온 발레로는, 그제야 또다른 일본인 통역과 다저스 구단의 위기관리 담당자, 소통 대변인 등을 대동하고 컨퍼런스룸에 들어왔다. 이 자리에는 미즈하라의 일본인 아내도 동석했고 한다. 발레로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담당 변호사와 재무 담당자 등도 온라인으로 동석하게 했다.
당사자가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진작에 열렸어야 하는 회의가 그제서야 열렸고, 미즈하라가 철저히 오타니와 에이전트, 다저스 관계자들을 속여온 ‘진실’이 마침내 공유된다. 다저스 구단은 곧바로 미즈하라를 해고했고, 오타니의 소통 대변인은 19일 미즈하라와 전화인터뷰를 했던 미 ESPN에 전화를 걸어 “미즈하라가 전부 거짓말을 했다. 보도를 하지 말아달라”고 연락했다.
지난달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LA 다저스 오타니의 기자회견에 동행한 미즈하라 잇페이 통역사./정재근 스포츠조선 기자
이후 사건의 진상은 오타니의 기자회견과 미 연방검찰의 수사 등으로 몽땅 드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아무리 미즈하라가 오타니 몰래 계좌에서 돈을 빼냈다고 해도, 오타니가 자기 계좌를 들여다 본 순간 이상함을 눈치채지 않았을까?”
NYT는 이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시한다. “2018년 2월 오타니가 미즈하라의 도움으로 애리조나의 한 은행에서 계좌를 만든 이후, 약 3년간 오타니는 단 한번도 자신의 계좌에 로그인한 기록이 없다.”
미즈하라가 불법 도박에 빠져 오타니 계좌에서 손을 대기 시작한 건 2021년 무렵. 즉, 미즈하라가 오타니 몰래 계좌에 로그인해 돈을 뺴내기 시작하기 전까지, 오타니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계좌를 확인하거나 열어보지 않았다. 지난달 미즈하라의 거짓말을 알기 전까지도 쭉 그랬을 공산이 크다.
엄청난 연봉을 버는데도 돈에는 너무나 초연한 오타니는 그야말로 ‘야구밖에 모르는 순진한 바보’였고, 미즈하라는 이런 오타니의 특성을 알고 처절히 악용한 셈. NYT는 “미즈하라를 수사한 미 연벙검찰의 공소장에 오타니는 오타니가 아닌 ‘피해자A(Victim A)’로 불린다”고 전했다. 이번 스캔들에서 오타니는 순진하지만 분명한 피해자였다는 게 미 연방검찰의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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