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력(억제력)은 강화하더라도 북·중·러와 대화의 여지를 열어둬야 한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데 억지력 강화는 ‘필요 조건’일 뿐 ‘충분 조건’은 아니다. 대화와 협상이 있어야 한다. 주어진 상황에서 이 둘을 어떻게 배합하느냐를 두고 논쟁할 순 있지만 반드시 섞여야 한다.”
더불어민주연합 비례대표 2번으로 22대 국회에 입성하게 된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17일 자 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억제력 강화와 대화를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데, 윤석열 정부는 전자에만 치우쳐 남북, 한·중, 한·러 관계가 최악에 빠졌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밝힌 입장이다.
‘억제력 강화와 대화 병행 노선’은 위성락 당선인 개인 의견을 넘어 민주당을 비롯한 범민주계열의 도그마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문재인 정부가 대화를 적극 추진하면서도 억제력 확보를 위한 군비증강이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를 압도한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또 민주당은 2020년 총선에서 ‘세계 5위의 군사강국 건설’을 국방공약으로 내세웠는데, 미국의 군사력 평가기관인 에 따르면 올해 한국의 군사력이 세계 5위로 올라섰다. 21대 총선 민주당의 공약들 가운데 유일하게 실현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마도 22대 국회에서도 민주당은 ‘억제력 강화와 대화 병행’을 견지할 것이다. 정권 교체에 성공해도 마찬가지일 공산이 크다. 하지만 민주당을 포함한 우리사회와 정치권이 이 도그마를 근본적으로 성찰하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는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런지 차분히 짚어보자.
우선 판이 바뀌었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는 ‘억제력 강화와 대화 병행’이 가능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이 한·미·일, 특히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는 데에 있었다. 핵과 미사일도 이를 위한 외교적 카드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2019년을 거치면서 북한은 미국과 한국에 대한 미련을 접고 핵무력을 ‘국체’로 삼으면서 국가전략을 전면 수정했다. 한·미·일과의 관계 개선을 중시했을 때에는 핵개발이 ‘수단’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반면에, 미련을 접은 후에는 핵무력 자체가 안보·경제·외교를 아우르는 ‘목적’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대화 단절이다. 남북대화는 윤석열 정부 들어 중단된 것이 아니다. 2018년 12월을 끝으로 2022년 5월 문재인 정부 임기 종료 때까지 공식적인 대화는 한 번도 없었다. 1971년 남북대화가 시작된 이래 최장기간이다. 윤석열 정부가 이 기록을 깰 가능성이 높지만 말이다. 북미대화 역시 2019년 10월 이후 제로 상태이다.
이와 관련해 여전히 2019년 2월에 있었던 ‘하노이 노딜’에서 그 원인을 찾는 목소리가 높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하노이 노딜 이후 한미연합훈련이 재개되고 F-35를 비롯한 첨단무기 도입이 본격화되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7월에 “만나서는 평화의 악수를 나누고 돌아서서는 미국과 연합훈련을 하고 첨단무기를 도입하는 이상한 행태를 중단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권언’은 철저하게 무시됐다. 트럼프의 중단 약속에도 불구하고 8월에 한미연합훈련이 재개되고 문재인 정부가 사상 최대 규모의 군비증강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북한의 평화를 지켜주는 것은 핵무기가 아니라 대화와 신뢰”라며 대화 재개를 촉구했었다. 또 남북이 힘을 합쳐 일본을 따라잡아 보자고도 했었다. 이에 대한 북한의 응답이 “삶은 소대가리 양천대소할 노릇”이라는 막말이었다.
그 이후에도 북한은 한미연합훈련과 남한의 첨단무기 도입을 “근본 문제”라고 일컬었지만, 한미연합훈련과 문재인 정부의 역대급 군비증강은 계속됐다. 북한도 전술핵과 다양한 발사체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단계적 군축’을 약속했던 남북이 사상 최악의 군비경쟁과 대화 제로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 지난 3월 20일 경기도 연천군에서 실시된 한미연합 제병협동 도하훈련에서 육군 K1E1 전차가 한미 장병이 설치한 부교를 건너고 있다. 이번 훈련에는 육군 5공병여단과 5기갑여단, 미2사단/한미연합사단 장병이 참가했다. ⓒ연합뉴스
억제력 강화와 대화 병행이 거의 불가능해지고 있다는 점은 오늘날에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윤석열 정부 들어 ‘주적’ 관계로 회귀한 남북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북미관계와 북일관계를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억제와 대화를 대북정책을 두 축으로 삼아왔지만, 억제력만 강화되어왔을 뿐 북미대화는 한 차례도 없었다. 기시다 정권도 북일정상회담을 타진해왔지만, 북한으로부터 납치문제는 물론이고 “자위력”, 즉 핵과 미사일 문제도 의제가 될 수 없다는 답변만 반복해서 듣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억제력을 강화하면서 북한에 대화를 제의하면 효과가 있을까?
그래서 민주당계 인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윤석열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한 비판 못지않게 자신을 향한 성찰이다. 억제력 강화와 대화 병행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을 직시하고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대안의 토대는 이미 마련되어 있다. 억제력 강화를 자제해도 될 정도로 강해졌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선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만 강해진 것이 아니라 한국의 군사력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특히 남북의 전쟁수행능력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에 따르면, 2017년 세계 12위와 18위였던 남북의 군사력 순위는 2024년에는 각각 5위와 36위로 나타났다.
미국의 확장억제를 포함한 한미동맹과 한미일 군사협력도 강해졌고, 유사시 전력을 공급하겠다는 유엔사령부 회원국도 10여 국에 달한다. 이쯤되면 대북 억제력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넘쳐난다.
사정이 이렇다면, 억제력 강화를 자제하면서 적극적으로 대화와 협상을 도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다른 행동을 함으로써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한국은 이미 이러한 힘을 갖고 있다. 이제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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