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을지로 ‘전주집’
서울 입정동 시절 전주집 외관. 1989년부터 2021년 말까지 영업했다. /김도진 제공
직접 고기를 썰고 있는 홍성준 대표의 모습. 오른쪽이 부인 박연숙씨다. 김도진 제공
1989년 4월에 개업했으니 벌써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서울 중구 입정동 청계천변 청소년회관 맞은편에 자리한 전주집은 필자가 행원 시절부터 다니기 시작한 오래된 식당이다. 1991년 2월 대리 승진을 했을 때부터 직급별 승진 시에 동료들과 함께 회식하던 곳이다.
은행장 취임 후 모 언론사의 ‘맛있는 만남’ 코너에서 필자를 초대해 맛집을 소개한 적도 있는데, 그때도 나의 선택은 어김없이 전주집이었다. 깨끗한 집도 아니고 비싼 집도 아니지만,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푸근한 집이라는 점이 오랜 세월 함께하면서 느낀 전주집의 매력이다.
기업은행은 일 년에 두 번 인사를 한다. 전국적으로 3000명에 가까운 직원이 승진과 이동 등의 발령을 받게 된다. 그러면 은행 주위의 식당은 기업은행 직원들로 늘 붐비곤 했다. 그중에서도 전주집은 기업은행 직원들이 가장 애용하던 단골 식당 중 하나였다. 부담 없는 가격에다 많은 직원이 동시에 들어갈 수도 있었으니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기업은행 직원들이라고 하면 주인장 부부가 그리도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해 주셨으니 자주 들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또 직장인들의 회식이라는 게 당시만 해도 1차를 마치면 2차로 이어지는 게 ‘국룰’이었다. 을지로3가 주변에 호프집까지 즐비해 전주집은 회식 장소로선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은 ‘힙지로’라고 불릴 만큼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거리가 됐지만, 그때만 해도 을지로는 그저 옛날 운치가 넘치는 정겨운 뒷골목이었다. 도기 가게, 인쇄공장 등 낙후된 골목길의 모습이 어우러져 시골에서 올라온 필자에게는 묘한 동질감마저 선사해 주던 곳이었다.
홍성준 대표와 부인 박연숙씨가 필자의 사진이 담긴 기사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왼쪽). 전주집의 대표 메뉴
을지로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본론으로 돌아와서 전주집 얘기를 좀 해볼까 한다. 전주집은 삼겹살을 불판에 올린 다음 콩나물과 부추를 같이 데워 먹는 맛이 일품이다. 파무침에 달걀을 섞어 먹으면 금상첨화다. 마지막에 콩나물과 부추 그리고 김치와 남은 고기를 볶아 볶음밥으로 먹으면 화룡점정이 따로 없다.
전주집은 생고기를 급랭시켜 작업한다. 굽기도 쉽고 부드러우면서도 고소한 맛이 일품인 냉동 목삼겹살을 내놓을 수 있는 비결이다. 홍성준 대표의 얘기를 빌리면 초기에는 냉동된 고기를 직접 손으로 얇게 썰어야 했단다. 팔과 어깨가 무척 아파 병원 치료를 받으면서 썰었다고 한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모두가 힘들게 살던 시절이었고, 어려운 시기였다. 지금은 육절기를 사용하니 한결 편해졌다고 한다.
전주집은 초기에는 단층이었다. 얼마 뒤 증축해 2층에선 비교적 여유 있는 식사도 가능해졌다. 당시 2층에서 서빙하던 한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갈 때마다 필자를 알아보고는 친절하게 응대해 주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입정동 시절을 뒤로하고 전주집은 재개발지구로 편입돼 2021년 12월 31일까지 영업하고선 문을 닫았다. 다행히 2020년 11월 옛날 가게에서 멀지 않은 수표동에 마련해 운영 중이던 2호점이 지금은 전주집의 명맥을 잇고 있다. 수표동에 새 둥지를 튼 것 역시 기업은행 본점과 멀지 않은 곳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홍 대표의 생각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수표동 인근 지역 역시 한때는 전형적인 인쇄골목이었다. 지금은 완전히 바뀌어 ‘힙한’ 공간이 됐다. 외국인들도 종종 눈에 띈다.
현재의 서울 수표동 전주집 입구 /김도진 제공
예전 가게가 2층이었던 것과 달리 수표동 전주집은 3층이다. 옥상에 루프톱까지 마련해 실제로는 4층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여름이나 가을이면 옥상의 지붕을 열어 놓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운치 있는 식사가 가능하다. 입정동 시절이 전형적인 노포 느낌이었다면, 수표동 전주집은 요즘 세대의 젊은 감성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깨끗한 실내 인테리어에다 공간도 넓어 고객들이 여유롭게 식사를 할 수 있다. 서울의 밤을 만끽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됐다.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오른다. 개업했다며 홍 대표의 부인 박연숙씨가 직접 떡을 들고선 은행을 찾아왔다. 이후로도 개업 기념일이 되면 박씨는 은행 부서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떡을 건넸다. 그는 나를 볼 때마다 그때 너무 고마웠다는 인사를 빼놓지 않는다. 주스 한 잔을 내밀며 격려를 전했다나 뭐라나(워낙 오래전 일이어서 사실 필자는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 심지어 당시를 회상하다가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니 필자로서는 그저 과분할 따름이다.
주인장 부부 모두 천성이 착한 분들이다. 그들을 알게 돼 직장생활의 애환을 달랠 수 있었고, 은행장이라는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생각하니 보통 인연이 아니다 싶다. 퇴임 후에도 새로 이전한 수표동 가게를 가끔 찾는다. 갈 때마다 항상 손님이 가득하다. 활기 넘치는 분위기에 덩달아 힘이 나고 기분이 좋아진다. 식당 입구와 손님 대기 장소에 걸려 있는 필자의 사진을 보면 열정적으로 동분서주하던 현역 시절이 새삼 그리워지기도 한다.
어느 정도 기틀을 잡은 가게에 아들마저 힘을 보태고 있으니 이제 더욱 번창할 일만 남았다. 오랫동안 손님들과 함께하는 전통과 역사의 전주집이 되기를 바란다. 주인장 부부의 건강을 기원한다.
필자는 1959년생으로 1985년 IBK기업은행에 입행했다. 전략기획부장, 부행장을 거쳐 2016년 12월 제25대 은행장에 취임했다. 2019년 12월 퇴임했고, 현재 한국평가정보 이사회 의장과 법무법인 세종에서 고문직을 맡고 있다. 〈내면을 깨우는 사색〉(2022), 〈내 인생의 나침반〉(2023) 등의 서평 모음집을 냈다.
김도진 전 IBK기업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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