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각 발표 22분 전에 전격 경질된 홍순영 외교부 장관

개각 발표 22분 전에 전격 경질된 홍순영 외교부 장관

(서울=연합뉴스) 박일 기자 =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신임 홍순영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1998.8.4 (끝)

[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

해외 순방 준비하다가 갑자기 교체돼 ‘쇼크’

‘7인의 탈북자’ 잘못 처리 문책 명목이었으나

DJ 측근들 인사 청탁 거부로 “오만하다” 찍혀

[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을 역임하며 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그간의 경험과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주요 사안을 매주 일요일 전해드립니다.]

1999년부터 지난 25년간 교체된 13명의 외교부 장관은 대부분 외교 사안과 관련해서 경질됐습니다. 홍순영 외교부 장관도 물러날 당시의 명목은 탈북자 문제를 잘못 처리했다는 것인데, 사실은 권력 실세들과의 불화로 인해 교체된 특이한 경우였습니다.

홍 장관은 1998년 8월 러시아와 ‘스파이 맞추방 사건’ 여파로 경질된 박정수 장관의 후임으로 임명된 후 강한 리더십으로 빠르게 조직을 장악했습니다. 미국의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대북 정책에서 호흡을 맞추고 김대중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어 최소한 2000년 4·13 총선이 끝날 때까지는 유임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홍 장관의 낙마는 예상 밖이었습니다. 2000년 1월 13일 홍 장관이 전격 경질된 장면은 지금도 명확하게 기억할 정도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홍 장관이 유임될 것으로 보고, 취임한 지 2년 가까이 된 한덕수 통상교섭본부장(현 총리)이 어떤 자리로 옮기느냐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날 오후 5시 무렵 정치부 데스크로부터 긴급 지시를 받았습니다. “홍 장관이 오늘 경질될 테니 후임 장관이 누가 되는 지를 취재하라. 장관실 분위기를 미리 파악해 보고 관련 기사를 준비하라.”

“설마, 그럴 리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즉시 외교부 장관실로 뛰어 올라갔습니다. 이때만 해도 홍 장관은 자신이 경질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홍 장관 경질 및 후임 장관을 취재하자 “이 기자,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것이냐”고 화를 내는 보좌관도 있었습니다.

당시 외교부는 홍 장관이 유임될 것으로 보고 2000년 1월 24일부터 2월3일까지의 홍 장관 외국 방문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러시아, 모로코, 코트디부아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잇달아 방문할 계획이었습니다.

제 취재기록에 따르면, 홍 장관은 1월13일 개각 발표를 불과 22분 앞둔 오후 6시 38분에야 자신의 거취를 알 정도로 전격 경질됐습니다. 홍 장관이 이날 오후 6시 정부중앙청사 대강당에서 열린 박태준 신임 총리 취임식에 참석한 후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청와대에서 홍 장관 집무실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청와대 한광옥 비서실장실에서 걸려 온 이 전화는 우선 홍 장관이 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이어서 이정빈 당시 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의 휴대폰 번호와 자택 전화번호를 물었습니다. 당시 전화를 받은 여비서는 직감적으로 장관이 경질되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홍 장관이 장관 집무실에서 한광옥 실장으로부터 경질을 통보받은 후 굳은 표정으로 간부회의를 소집했습니다. 홍 장관은 이어 이정빈 국제교류재단 이사장과 통화했습니다. 이정빈 장관에 따르면, 서울법대 동기 사이인 홍 장관은 “당신, 장관이 되는 줄 알고 있었던 것 아니냐. 축하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홍 장관 경질 직후의 유력했던 분석은 당시 현안이었던 ‘7인의 탈북자’ 문제를 적절히 다루지 못한 데 대한 문책인사라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을 거쳐 러시아로 탈북했던 7인의 탈북자가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사실이 알려져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탈북자 문제에 대한 부적절한 대처로 인해 총선을 앞두고야당에 공격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으니 화근을 제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여권 실세들과 불편한 관계가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는 당시 임동원 국정원장과 함께 김대중 정부의 포용 정책을 추진할 적임자로 평가됐지만, 여권의 핵심 인사들과 마음을 트지 못했습니다.

외교부 주변에서 홍 장관이 권력 실세들과 불화한 계기들이 취재됐습니다. 여권 실세인 A씨가 “외교관 B씨가 현직을 마치고 난 후 다음 보직을 선진국으로 가게 해 달라” 요청했다고 합니다. B씨의 경우, 업무 능력이 괜찮아 A씨가 청탁한 곳의 대사로 나가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홍 장관은 “인사 원칙상 불가하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 후 A씨가 “홍 장관이 너무 오만하다”고 말한 것이 정관계에 퍼졌습니다.

다른 여권 실세 C씨가 홍 장관에게 외교부 고위 간부인 D씨를 승진시켜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D씨는 C씨의 자녀가 외국에 있을 때 현지에 근무하면서 가끔 C씨의 자녀를 돌봐준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홍 장관은 강한 어조로 거절했습니다. 또 다른 여권 실세 E씨도 비슷한 인사 청탁을 하다 거절당했습니다. E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외교관 F 씨에 대해 홍 장관에게 인사 청탁을 했습니다. 소위 핵심부서가 아닌 외곽부서에 있던 F씨를 좀 더 좋은 자리로 옮겨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E씨가 “F 씨가 똑똑하니 좋은 자리로 옮겨달라”고 부탁하자, 홍 장관은 “그렇게 똑똑하면 데려다 쓰시라”며 아예 말을 잘라 버렸습니다.

일련의 사건 후 여권에서는 홍 장관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다고 오만하다는 평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국회나 당정협의회에서 여당 국회의원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됐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는 증언이 이후에 공개적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P.S.

1. 홍 장관은 사무라이를 연상시키는 강한 성격입니다. 그가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 구체적인 경질 이유를 취재하기 위해 전화했을 때 그는 딱 부러지는 어투로 말했습니다. “재직 중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직무와 관련된 일에 대해 일체 이야기하지 않겠다.”

1. 김대중 대통령이 홍 장관에 대해서는 호감을 가졌던 것은 분명합니다. 홍 장관은 경질된 지 6개월 만인 2000년 7월 주중 대사로 부임합니다. 이어서 2001년 9월에는 통일부 장관에 임명됐습니다. 주중대사, 통일부 장관 재임 기간이 짧았지만, DJ가 홍 장관을 잇달아 요직에 기용한 것은 그의 업무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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