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래로도 모자랄 판인데
윤석열 대통령이 1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중동 사태에 따른 긴급 경제·안보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따지고 보면 총선 전이나 후나 달라진 건 없다. 야당의 압승에도 200석 개헌선은 넘지 못했고, 더불어민주당이나 범야권 단독의 입법처리나 특검엔 대통령 거부권도 유효하다. 지금처럼 시행령으로 우회하는 행정권력 행사도 가능하다. 국정운영이 대통령 마음먹기에 달려 있기는 하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신승 후 인수위 시절인 2022년 3월 여당 원로인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는 뜻밖에 거국중립내각을 주장했다. 의회권력이 민주당에 완전히 넘어간 상황에선 국정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야당 협조를 구해야 한다는 취지다. 당시엔 주목받지 못했다. 정권 입장에서 이전 정권 청산과 신정권의 공약 로드맵 이행이 급한 마당에 굳이 권한 일부를 내려놓을 이유도 없었을 터이다.
우리 정치는 진보당 계열인 조봉암 등이 포함된 건국 내각 이후로 거국중립내각을 해본 적이 없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여소야대의 정치적 위기를 3당 합당으로 모면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5년 7월 여당 과반임에도 지지율 열세에 선거와 정치구조 개편을 조건으로 야당인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했다. “민생에나 힘써라”는 야당의 핀잔은 물론 여권 내부조차 반발이 심해 연정 제안은 실현되지 않았다. 대통령제에서 권한 일부를 내려놓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표면적인 표 계산과 달리 총선 결과는 이 정부에 정치적 위기로 간주된다. 총선 전후 같은 여소야대라도 그 의미는 180도 다르다. 윤 정부 출범 수 개월 뒤 이루어진 지방선거의 여당 완승은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감에 힘입은 바 크다. 돌아보면 정권의 오만과 여야의 대결이 정치를 지배하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대통령 임기 3년 차를 앞두고 치른 이번 총선에선 윤 정부에 대한 민심의 기대가 완전히 꺾였다. 더 이상의 인사전횡, 불통, 정치 마비를 두고 보기 어렵다는 국민의 목소리나 다름없다. 시행령 정치도 전과 달리 여의치 않을 터이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도 큰 역풍을 맞을 일이다. 야당의 거센 반발은 물론 여권 내 균열은 대통령을 조여올 터이다. 여당을 좌지우지하려는 대통령의 노력은 동티가 날 게 뻔하다. 여야는 2년 뒤의 지방선거, 나아가 3년 뒤의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둔 정치적 행보와 대통령 거리두기를 할 수밖에 없다.
압도적 여소야대와 덩달아 높아진 국정 불안정성으로 윤 대통령에 대한 요구가 쇄도한다. 변해야 하고, 달라져야 한다는 주문이다. 마이웨이 정치, 고집과 불통의 정치, 협량의 정치를 한 대통령이 짊어져야 할 업이다. 회피해온 기자회견을 통해 소통을 넓히고, 영수회담이나 인적 쇄신으로 국정을 일신해야 한다는 말들이다. 김건희 여사, 채 상병 등 특검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그리한들 안정적 국정 운영이 가능할까. 임기 2년에 대통령은 레임덕에 직면했다. 이젠 가래를 들어도 모자랄 정도로 엄중한 시국이다.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 등 숱한 약점에도 꽃놀이패를 쥐게 된 민주당 입장에서 절제할 이유가 없다. 언제라도 완력을 사용할 준비가 된 참이다. ‘그 나물에 그 밥’인 인사나 국정 기조 전환 시늉만으론 어림없다는 소리다. 야당 협조를 받지 않고선 정상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없다. 해서 여야 협치기구나 야당의 추천을 받은 인사 등으로 구성된 거국 내각 내지 중립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얘기가 여야 안팎에서 나오는 것이다. 대통령이 제대로 된 승부수, 결단으로 기조 변화에 대한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의미다. 정권 논리나 대통령의 자존심보다 국정과 국익, 국민의 삶을 깊이 생각해야 할 대통령의 시간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요구받고 있는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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