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처형당하는 게 당연…인정하기까지 몇 년 걸렸다"(中)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영화·시리즈를 흥미롭게 관람하는 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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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처형당하는 게 당연…인정하기까지 몇 년 걸렸다”(中)

*이시이 시로는 중일전쟁이 본격화된 1939년 8월 노몬한 사변(할힌골 전투)에서 (만주국과 몽골 사이 국경) 지류에 티푸스와 파라티푸스, 콜레라균, 마비저균을 살포했다. 관동군은 그해 10월 이시이에게 감사장과 공4급금훈장, 육군기술유공상을 수여했다. 고무된 이들은 그 무렵 중국 닝보에서 항공기로 페스트 벼룩을 저공 살포해 106명을 죽였다. 1941년 창더 작전에서도 페스트 벼룩 36㎏을 저공 살포해 1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듬해 저장성 취저우에선 우천 속에 페스트 벼룩을 투하해 2000명 이상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731부대와 난징 사카에 부대(1644부대)는 1942년 저간 작전에서 중국 위산, 진화, 푸장 등에 페스트균과 콜레라균, 파라티푸스균을 살포했다. ‘페스트 벼룩’이 이용했으며, 일부 세균은 물과 주거지 오염, 만두에 독물을 넣는 방법으로 전파했다. 당시 준비한 파라티푸스균과 탄저균 양은 130㎏에 달했다. 감염지구에 들어간 일본군 측에서도 1700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731부대에 자원해 입대한 세균학자 이시카와 다치오마루는 1943년 7월 페스트균 살포 실험으로 희생된 사망자 해부 표본 쉰일곱 구를 챙겨 일본으로 귀국했다.

*일본군은 페스트균을 풍선 폭탄에 탑재해 사이판, 괌, 이오지마 등에서의 결전에서 사용하려 했다. 계획은 도조 히데키 천황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살상력이 검증된 새로운 무기였으나 기술이 완벽하지 않아 아군에게도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

*이시이는 도고 부대를 통해 포로를 이용한 인체실험 체계를 확립했을 뿐 아니라 수많은 대학 연구자를 끌어들여 과학기술을 도입했다. 이렇게 비인도적 개인적 발상을 과학기술로 실현한 또 다른 사례로는 옴진리교 사린가스 테러 사건이 꼽힌다. 전자는 국가가 배경에 있는 공적 조직, 후자는 종교적 광신자와 과학자 간 결합이었다. 두 경우 모두 사회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일이 진행됐다.

*다음은 731부대에서 소년 대원으로 일했던 시노즈카 요시오의 증언이다. “이시이 시로는 대좌였습니다. 언뜻 보기엔 군인답지 않아 보였습니다. 보통 군인이라면 장화를 신고 있어야 하는데 장화도 안 신고, 군도 칼끝을 내려뜨린 채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모자도 쓰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와 힐끗 둘러보고 가정 먼저 한 말은 ‘얼굴색이 안 좋은 사람이 있다. 신체검사를 다시 하라’였습니다. ‘역시 의사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공부하면 하얼빈의대나 하얼빈학원에 갈 수 있다. 공부를 먼저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부관에게 ‘다시 한번 제대로 신체를 검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 외에는 ‘하얼빈은 좋은 곳이다. 가는 시기에 대해선 나중에 지시하겠다. 맛있는 거라도 많이 먹고 있어라’와 같은 이야기였을 겁니다. 하얼빈에서 그런 잔혹한 짓을 하거나 그것을 지휘하고 계획할 줄은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중략) 분실에 가보니 언제 만들었는지 우리의 신분증이 완성돼 있었습니다. 사진까지 붙여진 신분증을 받은 뒤 군용차를 타고 핑팡(731부대 본부가 위치한 하얼빈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높은 굴뚝이었습니다. 입구에는 ‘관동군 사령관 허가가 없는 자는 그 누구도 출입을 금한다’라는 자그마한 간판만 있을 뿐, 부대를 나타내는 무언가는 없었습니다. 주변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내부에 들어가니 부대원들의 타임 카드를 꽂는 장치가 수위실 앞에 있었습니다. 들어갈 때 타임 카드를 찍고 출입 시간을 확인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중략) 도착한 다음 날부터 바로 교육이 시작됐습니다. 우리는 병사들과 함께 내무반에서 생활했습니다. 반장은 군조(중사) 부사관이 맡았습니다. 다음날 헌병이 군규보호법에 대해 교육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 지역은 특별군사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일본군 비행기라 할지라도 이 상공은 비행할 수 없다.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도 말라. 이것이 부대 원칙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중략) 다음 날도 같은 헌병에게 교육받았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다나카라고 했는데 본명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나카는 쭉 731부대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날 교육은 육군 형법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말은 ‘여기서 도망치면 대치 상황에서의 군무이탈로 보고 처형당한다’ 입니다. 이틀 동안 교육받으면서 저는 ‘도대체 이 부대의 정체가 뭐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대장이 군의이며 많은 대학에서 이른바 ‘의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대거 와 있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왜?’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당시 군국주의를 교육받아서인지 ‘무언가 보람 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환상이 있었습니다. 공포심은 전혀 없었습니다.”

*시노즈카는 “노몬한 사변이 일어나고 세균 대량생산이 시작됐다”고 밝혔다. “아직 세균을 만드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명령받은 것은 연구실에 가서 세균을 대량 생산할 때 쓰는 균주(순수하게 분리하여 배양한 세균이나 균류)를 받아 오는 일이었습니다. 균주는 보통 큰 시험관 안에 기울여 응고시킨 한천 배지에 심었고, 거기에 세균 배양을 위해 부용(고리를 넣어 오래 끓인 국)을 넣었습니다. (중략) 분업을 통해 세균을 대량 생산했습니다. 오전에 전날 이식한 세균을 긁어내고, 오후에 이식하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긁어낸 세균은 입구가 넓은 펩톤의 빈 병에 담았습니다. 부사관을 따라 운반에 참여했습니다. 하얼빈역에서 하이라얼까지 부사관은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유럽까지 갈 수 있는 국제열차였지만 당시만 노몬한 중간까지밖에 안 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짚으로 싼 상자를 두세 명이 들고 열차에 탔습니다. 우리는 ‘통풍이 잘되는 곳에 가서 앉아 있으라’고 지시받았습니다. 하이라얼에 도착해서는 엄중한 경호를 받았습니다. 트럭에 기관총까지 실어 하이라얼에서 장군 묘라 불린 노몬한의 전방 기지까지 상자를 운반했습니다. 저는 이때 딱 한 번 운반에 참여했는데, 이 세균이 어떻게 사용됐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노몬한에 직접 간 사람들 이야기에 따르면 할하강 상류에 있는 호르스텐 강 지류에 투하됐다고 합니다. (중략) 노몬한에서 돌아오는 병사들 가운데 환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우리 부대는 균 검사라고 해서, 돌아오는 병사들의 변을 검사하고 격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저도 거기에 동원됐습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납니다. 우리는 셀로판으로 덮여 있는 변을 넓게 펴는 작업을 명령받았습니다. 그 지독한 냄새 때문에 며칠 동안 밥을 못 먹을 정도로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한 번 노몬한에 갔다는 이유로 종군휘장을 받았습니다. 부대장이던 이시이 시로는 육군 최고기술 유공장을 받았습니다. 이때 부대에서는 ‘일본군을 감염시켜놓고 무슨 훈장이냐’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세균을 무기로 사용해 사람을 죽일 수 있음을 입증한 사건이 바로 노몬한이 아닌가 싶습니다. 1940년 봄부터는 중국 사람들에게 세균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중략) 이번에는 벼룩 분리 작업을 명령받았습니다. 확실히 벼룩은 늘어났습니다. 우리는 딱 한 번 항공반으로 벼룩을 운반한 적이 있습니다. 731부대 항공반은 마스다 약제 대위가 반장이었습니다만 실세는 히라사와라는 군의였습니다. 비행기를 직접 조종했는데 우리는 그곳으로 벼룩을 가지고 갔습니다. 시기적으로 중국 닝보 등지에서 발생한 세균전과 관련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실제로 저는 운반까지만 했습니다. 벼룩과 페스트가 매우 깊은 관계가 있음을 우리는 페스트에 관한 기초 교육을 받으면서 알게 됐습니다. ‘페스트가 유행하기 전에는 반드시 쥐가 죽는다. 쥐가 죽고 나서 사람이 감염된다. 그러니까 페스트 유행의 징후는 쥐다’라는 교육을 항상 받았습니다. 아무튼 벼룩이 닝보와 화중 지역에 전달된 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1941년 관동군 특별연습 때 소년대는 해체됐다. 많은 대원이 남쪽으로 도망갔다. 그 전에 죽거나 현역으로 지원하거나 파병을 간 사람이 많아서 이미 소년대 수는 많이 줄어 있었다. 그 무렵 시노즈카는 충수염으로 입원해 있어서 제4부 제1과 가라사와 반에 배속됐다. 부장은 훗날 하바롭스크 재판에서 형을 선고받은 가와시마 기요시 소장이었다. 반장도 형을 선고받은 가라사와 도미오 소좌였다. 가라사와 소좌는 1956년 석방 식전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시노즈카는 1941년 가라사와 반에 배치된 뒤 화학무기 취급자로 임명됐다. 다음은 그의 회고다. “이 명령을 받았을 때 ‘독가스라도 쓰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대는 독가스를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화학무기 취급자로서 수당으로 25엔이 책정됐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기본월급이 45엔 정도였고, 화학병 수당이 25엔, 재외지 수당이 45엔이었습니다. 하지만 매달 받은 건 기본월급뿐이었습니다. 가라사와 반에서 제가 주로 한 일은 세균 대량 생산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작전명령에 따라 진행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명령에 따라 콜레라균, 페스트균, 비탈저균을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우리가 배치받았을 무렵엔 탄저균을 제조했습니다. (중략) 독성시험은 동물을 사용해 결과를 확인해야 했습니다. 생체실험과 생체해부에도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그때는 정확히 몰랐지만, 당시 들은 것은 ‘사람의 몸을 이용하면 독성이 강해진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균주를 얻기 위해서라도 생체실험이 필요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가 소속됐던 제4부 제1과에 병리학자는 없었습니다. 세균학 담당이라고 해봤자 군의뿐이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저는 1942년 말부터 1943년에 걸쳐 실험에 참여했습니다. 맨 처음 해야 했던 일은 빈사 상태에 있는 사람의 몸을 씻는 일이었습니다. 자루 달린 솔과 고무호스를 이용해 물로 씻으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다리가 벌벌 떨려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두 명, 세 명 하면서 배짱이 생겼다고 할까요. 반장한테도 ‘이제 어른이 다 됐네’라는 소리를 듣게 됐습니다. 살인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확실히 떨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두 명, 세 명이 되면 배짱이 생기는 걸지도 모릅니다. 중국귀환자연락회(중국 푸순과 타이위안의 전범관리소에 수용됐던 일본인 1000여 명이 귀국 이듬해인 1957년 ‘일중 우호와 반전 평화’를 내걸고 설립한 단체) 회원 중에는 당시 초년병 교육에 총검으로 사람을 찔러 죽이는 것이 필수로 포함돼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분명 이러한 교육을 통해 한 명의 병사로 거듭났을 겁니다. 731부대에서 역시 사람 죽이는 것이 아무렇지 않게 행해졌고, 저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랐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도 점차 극악한 범죄 속으로 빠져들게 됐습니다. 사실 이건 제 몸도 위험해지는 일이었습니다. 계속하면 언젠가 곧 감염돼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저는 징병 검사에서 현역 입대가 확정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 부대에서 나와 일반부대로 옮기는 걸 고려해봤습니다만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시노즈카는 “패전 뒤 스스로 책임이 있다고 인정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고백했다. “예전에는 ‘명령이다,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내 목숨이 위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어떨까? 피해자들은 과연 실행자를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볼까? 내가 만약 피해자였다면 당연히 실행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을까?’ 점차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실행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실행자는 실행자로서 책임을 다함과 동시에 명령자의 책임을 추궁함이 올바른 방법 아닌가?’라고 이해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피해자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증언합니다. 이는 일본 정부가 추진한 정책이므로 국가로서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를 위해 지금까지 증언 활동을 해왔습니다. 사실 제게도 실행자로서 책임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내 목숨이 아깝다. 실행자로서 책임이 나에게 있다면 내가 처형당할지도 모르는데’ 이런 생각들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끝내 ‘나는 처형당해도 마땅한 인간이다. 처형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인정할 때까지 몇 년이 걸렸습니다. 푸순의 전범관리소에서 자살을 시도한 이도 있었습니다. 저도 전범관리소에서 몹시 괴로운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전쟁은 제정신으로는 행할 수 없습니다. 총을 들면 살인을 하게 되고,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국가를 위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은 부모와 형제를 위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중략) 그런데 최근 전쟁 전과 같은 교육이 또다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조짐이 있습니다. 또다시 우리와 같은 사람을 만들어내려는 건 아닌지 두렵기까지 합니다.”

*731부대에서 동상 연구는 요시무라 반에서 맡았다. 책임자인 요시무라 히사토 기사 이름이 붙은 이 반은 동상이 생기는 조건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진행했다. 전쟁이 끝나고 요시무라는 자신이 생체실험에 관여한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731부대에서 근무한 많은 일본 병사들의 증언으로 동상 예방연구라는 이름으로 잔인한 생체실험을 진행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요시무라 히사토는 1982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영하 4도 이상에서는 동상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0도에서 인체실험을 했다. 이는 위험성이 없어서 국제적으로 허용돼 있었다”며 일본 생리학회 영문지에 0도에서 실험한 결과를 발표한 이유를 설명했다. 아울러 “나는 동상이 생기는 생체실험을 하지 않았다. 동상 예방연구는 부하에게 맡겨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요시무라는 팡팡의 연구시설이 완공된 이듬해인 1941년 10월 26일 만주의학회 하얼빈지부 특별 강연에서 자신이 영하 20도에서 인체실험을 한 것에 관해 설명한 적이 있다. 그는 동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내지에서 말하는 동상과 중국 동북부 한랭지에서의 동상은 전혀 다르다고도 강조했다. 아울러 요시무라는 동상이 발생하는 원인으로, 한랭으로 인해 먼저 조직이 동결되면서 조직 파괴가 일어나고 그로 인해 염증이 생겨 혈전이나 혈관 마비가 일어나 혈액순환이 나빠지면서 괴사가 진행된다는 설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혹한기 동상의 경우, 반드시 조직 동결이 일어난 뒤에 동상이 발생한다.”

*더그웨이 문서는 다음과 같은 내력을 가지고 있다. “미국 유타주 더그웨이에는 미합중국군 화학·세균전 기지가 있는데, 이곳에는 일본 세균전 연구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광대한 극비 연구 센터 안에는 세균전과 관련한 다양한 최신 화학계의 출판물을 수집하는 전문 도서관이 있다. 미국 과학자들이 전쟁이 끝난 뒤 이시이와 기타노 그리고 살아남은 다른 731부대 간부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담은 스무 편이 넘는 리포트가 상자 안에 보관돼 있다. 세 편의 특별한 해부에 관한 리포트도 있는데, 마비저균과 페스트, 탄저균에 관한 연구 주제들을 망라한다. 한때 이 리포트들은 최고 기밀문서로 지정되었지만, 1978년 해제됐다.”

*1947년 4월부터 6월까지 일본에서 731부대 관계자들을 심문한 노버트. H. 펠은 일본의 세균전 활동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요약해 기록했다. 이른바 ‘펠 리포트’로, 1947년 6월 20일자로 화학전 부대 부대장에게 제출했다. 보고서 앞머리에는 “세균전 계획과 관련한 핵심 인물 가운데 열아홉 명을 모아 사람을 대상으로 행해진 세균전 활동에 대해 60쪽에 달하는 영문 리포트를 거의 한 달가량 시간을 들여 작성했다”고 적혀 있다. “세균전의 각종 병원체로 인해 사망한 200명이 넘는 피험자로부터 만들어진 현미경 표본 8000장이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중략) 이 리포트는 8월 하순에 입수할 수 있을 듯하다”라는 내용도 담겨 있다.

*나스 시게오에 의해 가네코 논문이 발견되면서 이전까지 단순히 일반적 ‘페스트 유행’이라고 여겨진 1940년 눙안 및 신징 지역 페스트 유행이 731부대가 실시한 세균 살포 작전임이 드러났다.

*731부대는 가스실험실도 운영했다. 516부대와 결탁해 여러 번 마루타를 이용해 실험했다. 가스 실험의 재료로 동원한 마루타는 대부분 다른 세균실험에 투입됐던 사람들이었다. 가스 실험은 마루타의 사망 상황과 시간을 관찰하기 위해 진행됐다. 닭, 개, 쥐, 비둘기 등 동물도 실험 대상이었다. 가스실험실 옛터는 현재 하얼빈시 화룽 연필공장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구조 자체가 손상된 상태다.

*731부대에 있던 베이강 시체 소각로는 ‘실험재료’를 은폐하기 위한 곳이었다. 주로 실험한 동물시체를 소각하는 용도로 사용됐는데 종종 마루타 시신도 태웠다. 소각로가 위치한 지역이 베이강이어서 베이강 시체 소각로라고 불렸다.

*731부대의 만행은 영국 방송국 TV 사우스가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악마의 포식’에 자극받아 제작한 프로그램 ‘731부대, 천황은 알고 있었는가?’로 널리 알려졌다. 약 3년 동안 만들어진 이 프로그램은 1985년 영국 최대 민간방송국인 ITV를 통해 방영됐다. 방송이 나가고 5년 뒤에는 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고 수집했던 방대한 자료와 인터뷰, 증언 등을 묶어 책이 출판되기도 했다. 2003년 일본어로 번역된 이 책 제목은 ‘731부대의 생물병기와 미국’이다. 번역을 맡은 니시사토 후유코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전쟁 범죄를 다룬 도쿄 재판을 통해 확립된 ‘인륜에 반한 죄’ 개념에 따르면, 세균전 부대의 활동 그 자체가 중대한 ‘인륜에 반한 죄’이며, 그 구성원인 의학자, 과학자, 군의, 하급 병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전범에 해당한다. 그러나 누구 하나 고발되지 않고 전범 소추를 면했다. 이는 살아있는 인간을 모르모트처럼 사용하는 인체실험, 병변과 생체에 대한 영향을 관찰하기 위한 생체해부, 그리고 세균전 실전에서 나온 귀중한 과학 데이터를 미군과 거래했기에 가능했다. 마루타로 불리던 인간 모르모토의 실체가 만주국 항일 게릴라나 간첩, 러시아 적군 병사, 중국에서 활동했던 조선인 항일 독립운동가 등이었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반면 연합군 포로를 동원한 세균전 관련 인체실험도 있었는지는 지금까지 수많은 연구자와 역사가 그리고 기자들이 조사했음에도 명확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니시사토는 다음과 같은 문제도 제기했다. “미국화된 일상생활을 보내는 지금의 일본 젊은이들은 일본이 미국, 영국, 호주와 서로 죽이며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더욱이 그들을 포로로 잡아 탄광이나 공항 건설에서 혹사했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포로 문제를 조사하고 포로 체험자들의 증언을 기록해 과거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은 중요하다. 이를 사회적 기억으로 이어 나가야 비극과 살육을 낳는 전쟁을 확실하게 거절할 수 있는 인식이 갖춰질 수 있다.”

*일본은 만주에 연합군 부로(포로) 수용소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세 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만주 사람들에게 일본에 저항하면 호되게 당할 수 있다는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다. 두 사건이 이를 뒷받침한다. 첫 번째는 1944년 6월 미군 포로 세 명이 950㎞ 떨어진 소련 국경을 향해 탈주한 사건이다. 열하루 동안 계속 걸어 180㎞ 떨어진 몽골 마을에 도착한 포로들은 경찰관을 살해하고 마을 사람을 다치게 했다. 결국 붙잡혀 펑톈으로 이송됐다. 단편적 증언을 모아보면, 탈주한 세 명은 수용소 사람들 앞에서 ‘탈주는 절대 성공할 수 없으니 하지 말라’는 연설을 강요받은 뒤 수용소 입구에 있는 말뚝에 사흘 동안 묶여 있었다. 펑톈 시내를 끌려다니다 시민들 앞에서 총살당했다. 마지막에 총을 맞고는 그 직전 자신이 판 무덤으로 쓰러졌다. 두 번째는 격추당한 B29 탑승원이다. 1944년 12월 7일과 21일, 펑톈은 미군 B29 편대로부터 폭격받았다. 펑톈은 비행기 군수공장과 탄광 등이 있어 군사적 요지였다. 남만주 철도도 폭격의 표적이 됐다. 7일에 펑톈에서 격추된 B29는 나선형으로 급하강하다 추락했다. 탑승원 열 명이 즉사하고 한 명만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일본군은 그 기체에서 모터를 분리해 펑톈 시내 공원에 전시했는데 숨이 붙어 있었던 한 명을 모터에 묶어 두고 죽을 때까지 구경거리가 되도록 방치했다.

*또 다른 가설은 노동력이다. 펑톈에는 전투기 공장이 있었다. 일본군은 기술을 가진 포로들이 그곳에서 일하길 기대했으나 모두가 완강히 거부했다. 실제 제네바조약에서도 적국의 전쟁 수행을 위해 포로에게 강제 노역시키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펑톈부로수용소 부로 대부분은 만주공작기계 부품 제조공정에 투입됐다. 그들은 교묘한 수법으로 고의적인 태업을 벌였다. 제대로 만든 부품을 몰래 찌부러트리거나 공작기계 부품을 보수 작업 중인 콘크리트 바닥에 일부러 넣는 등 저항했다. 모두 독자적인 행동이었고, 조직된 저항은 아니었다. 목숨을 건 행위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나 군인으로서 불굴의 투지를 표현하기 위해 또는 삶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고 스스로를 고무시키기 위해 감행했다. 태업이 발각된 이들을 중심으로 미군 병사 포로 150명은 1944년 5월 기후현 가미오카 아연 광산에 보내졌다.

*마지막 가설은 세균무기를 위한 인체실험이다. 상황 증거가 있다. 세균전에 깊이 관여했다고 추정되는 일본군 군의가 통솔하는 의료시설 두 곳이 펑톈에 있었다. 이 두 곳을 염두에 두고 연합군 포로들을 펑톈으로 데려간 것은 아닌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태평양전쟁 개전 뒤 일본은 구미의 백인과 적대관계가 됨에 따라 비밀무기로서 중요시했던 세균무기를 백인종을 대상으로 실험해볼 필요가 있었다. 백인종에 대한 세균무기의 위력뿐 아니라 백인종 특유의 면역력은 없는지, 있다면 어떤 면역을 지녔는지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펑톈에 있던 의료시설은 만주의과대학과 펑톈육군병원이다. 전자는 이시이 시로에 이어 731부대 부대장을 맡았던 기타노 마사지 군의소장이 2년 반 동안 세균학 교수로 근무했던 곳이다. 현재는 중국의과대학으로 운영되나 과거에는 중국인을 생체해부 및 인체실험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다양한 의학 연구가 진행됐다고 추정된다. 실제로 이곳에는 엄청난 수의 병리해부 통지서가 보존돼 있다. 1943년 일본 해부학잡지에 발표된 만주의과대학 소속 다케나카 요시카즈 의사의 ‘북부 중국인 대뇌 피질, 특히 측두엽의 세포 구성학적 연구’에는 “재료는 장년, 특히 정신병과 같은 병력이 없는 건강한 북부 중국인의 대뇌를 사용했고 사후 몇 시간 안 된 것을 채취했다”라는 언급이 있다.

*1984년 방영된 다큐멘터리 ‘유니트 731’에는 포로 체험자들의 증언과 영국군 장교였던 로버트 피티 소좌의 일기가 담겨 있다. 후자의 1943년 2월 기록에는 펑톈부로수용소를 방문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연구자들은 그들이 731부대 관계자였다고 추정했다. 이는 도쿄 재판에 참여한 영국 검찰단이 증거 문서로 합수해 영문 번역까지 했으나 끝내 공개하지 않았던 관동군 사령관 명령서 영역본이 1995년 런던 공문서관에서 발견됨에 따라 사실로 확인됐다. 문서를 발견한 이는 영국군 포로로 펑톈부로수용소에 있었던 아서 크리스티였다. 사실 명령서 원본이 처음 발견된 건 1984년이다. 도쿄 간다의 헌책방에서 731부대 군의가 작성한 ‘파상풍균 인체실험 논문’, 마루타를 말뚝에 묶어 실험한 내용을 담은 ‘독가스무기 실험 보고서’ 등과 함께 발견됐다. 이 자료를 찾은 건 게이오대학 대학생이었는데, 그의 은사인 마쓰무라 교수의 지시로 종이상자 채로 구매돼 게이오대학 도서관에서 보관되고 있다. 그것은 원래 이노우에 요시히로 군의 소좌의 유품이었다. 이노우에는 전쟁 중 독가스전 전문가로 활동한 사람이다. 패전 뒤 제1복원성과 후생성을 거쳐 자위대 위생학교장까지 역임했다.

참고 자료 : 15년 전쟁과 일본의 의학의료연구회 엮음·하세가와 사오리-최규진 번역·발행처 건강미디어협동조합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731부대(2020)’, 김창권 지음·발행처 나눔사 ‘일본 관동군 731부대를 고발한다(2014)’, 전쟁과의료윤리검증추진회 지음·스즈키 아키라 번역·임상혁 감수·발행처 건강미디어 ‘731부대와 의사들(2015)’, 니시노 루미코 지음·한국번역연구원 번역·발행처 예림당 ‘731부대 이야기(1995)’, 진청민 지음·하성금 번역·발행처 교문사(청문각) ‘제731부대의 진상을 파헤친 일본군 세균전(2010)’ 등.

이종길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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