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앓은 딸 존엄사시킨 날, 엄마와 간병인은 축제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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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8년 앓은 딸 존엄사시킨 날, 엄마와 간병인은 축제 벌였다

8년 앓은 딸 존엄사시킨 날, 엄마와 간병인은 축제 벌였다

연극 ‘비Bea’.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제공

무대에 조명이 들어오면 소녀 비(김주연, 이지혜)가 비트 강한 음악에 맞춰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로 침대 위에서 춤을 춘다. 트램펄린 위에서 뛰는 듯 높이 도약하는 비의 넘치는 에너지는 객석까지 전해져 삶의 건강한 활력을 느끼게 한다. 그런 비가 “세상에 죽는 것보다 끔찍한 게 얼마나 많은데”라며 엄마 캐서린(방은진, 강명주)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

연극 ‘비Bea’는 병명을 알 수 없는 만성적 체력 저하 증상으로 8년 동안 침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가 존엄사를 요구하며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베아트리체라는 이름 대신 비라고 불리기를 원하는 그는 육체적 활동엔 제약이 있지만 정신만은 그대로이다. 연극에서 활기 넘치는 비의 모습은 실제의 비가 아닌 8년간 움직이지 못하는 육체에 갇혀 있는 내적 자아의 모습이다. 관객은 상상이 투영된 평균 이상의 생기 넘치는 비의 내적 자아를 주로 보게 된다. 그의 실제 상태는 어눌한 발음으로 간병인에게 의존한 채 생활하는 모습을 간간이 묘사함으로써 가늠하게 한다.

비의 새로운 간병인으로 레이(강기둥, 김세환)가 온다. 어딘지 어눌하고 부산스럽고 무엇보다도 남성인 레이를 캐서린은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러나 비가 레이를 좋아하고 만족해하자 딸의 말을 따르기로 한다.

레이는 누구보다 공감을 잘하고 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동성애자임을 숨기려 하지만 문득문득 드러나는 그의 본성을 감출 수 없다. 종잡을 수 없는 말을 쉬지 않고 수다스럽게 늘어놓는데, 대부분 거짓말이다. 레이의 예측 불가능한 성격은 극에 활력을 불어 넣고 무거운 주제를 유쾌하게 풀어가는 데 일조한다.

인간적 삶의 선택으로 그려진 ‘존엄사’

8년 앓은 딸 존엄사시킨 날, 엄마와 간병인은 축제 벌였다

연극 ‘비Bea’.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제공

엘리트 변호사인 캐서린은 책임감이 강하고 엄격한 원리원칙주의자이다. 딸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는 그는 남편이 딸을 버리고 떠났을 때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런 그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며 존엄사를 원하는 딸의 부탁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연극은 질문한다. ‘모든 행동과 욕망이 차단된 삶일지라도 살아갈 의미가 있는가.’ 존엄사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믹 고든이 영국 런던에서 이 작품을 초연한 2010년 이후 여전히 논쟁적 주제이다. ‘인간이 죽음을 결정할 수 없다’는 종교적 논리에 무게를 두는 사람들은 존엄사를 거부한다. 인간다움에 가치를 두는 이들은 단순한 생명의 연장은 의미가 없다고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 이 연극은 후자의 입장에 동조한다.

비의 정신은 모든 감각이 작동하지 않는 육체에 갇혀 있다. 그런 상태를 보여주려는 듯 주요 무대인 비의 방은 거친 콘크리트를 그대로 노출했다. 비가 만든 수백 개의 귀걸이로 벽을 치장했지만 방은 어두운 감옥 같은 느낌을 준다. 방은 비의 자유로운 정신을 가두는 육체의 상징인 셈이다. 갇힌 육체 속에서 비는 맛도 성적 감각도 느끼지 못한다. 정신은 모든 감각을 기억하고 욕망하지만 육체의 출구는 막혀서 어떤 감각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불치병 딸과 보호자 엄마, 동시에 감옥에 갇히다

불치병은 비를 수인(囚人)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엄마 역시 수인으로 살게 한다. 캐서린은 사랑으로 딸을 지키고 보호하면서 ‘의무감’이라는 굳건한 감옥 속에 감금된다. 딸의 간절한 부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캐서린은 스스로가 딸의 입장이 되어 보기로 한다. 육체의 활동을 금지하고 철저히 레이의 도움으로 일상을 지내 본 캐서린은 비의 존엄사 제안을 수락한다.

존엄사를 시행하는 날은 마침 비의 생일이다. 존엄사를 행하기 직전 가장 활기차고 에너지 넘치는 축제가 펼쳐진다. 시시껄렁한 농담과 장난, 비트 넘치는 음악과 춤과 함께 죽음은 어쩌면 가장 강렬한 삶의 에너지라는 듯 비와 캐서린, 레이는 축제를 벌인다. 비가 고통스럽게 약을 먹고 죽음을 맞는 장면에서 방의 벽이 사라지고 열린 공간이 드러난다. 비의 정신을 가두었던 육체가 무너진 것처럼. 연극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은 비를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비의 결정이 고통스러운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삶을 선택한 것이라는 듯. 연극 ‘비Bea’는 오는 3월 24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유플러스 스테이지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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