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 폭력’ 57% 늘었지만… 피해 막을 ‘법적장치’가 없다
서울 강남역 인근 건물 옥상에서 여자친구를 흉기로 살해한 혐의를 받는 20대 의대생이 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기 위해 들어가고 있다.안주영 기자 서울신문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명문대 의대생이 이별을 통보한 여자친구를 살해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연인 간 발생하는 ‘교제폭력’의 심각성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교제폭력은 연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신체적·정신적·성적 공격 행위를 포괄적으로 뜻한다. 경찰이 이번 사건을 교제폭력에서 살인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하고 있는 가운데 해마다 교제폭력 신고 건수와 적발 인원도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교제폭력으로 신고하더라도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는 여전히 부실하다. 가정폭력처벌법이나 스토킹처벌법처럼 연인 관계의 특수성을 반영한 별도의 법이 없어 가해자·피해자 분리가 어렵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아도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반의사불벌죄 규정도 없다. 연인 관계라는 점을 악용해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접근해 합의를 종용하거나 협박할 수 있다는 얘기다.
8일 경찰청에 따르면 교제폭력 신고 건수는 2020년 4만 9225건에서 지난해 7만 7150건으로 57% 증가했다. 올해 1~3월 신고된 건수만 해도 1만 9098건에 이른다. 이런 추세면 올해는 8만건이 넘는 신고가 접수될 것으로 전망된다.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만큼 피해자가 위협에 지속적·반복적으로 노출되기 쉽고, 신고 등 빠른 대처도 어렵다는 점에서 다른 폭력이나 강력범죄와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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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나는 신고에도 교제폭력 피해자는 보호받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우선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에서 교제폭력과 유사한 특징을 갖는 가정폭력처벌법의 경우 법원이 피해자 보호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폭력 행위자에게 퇴거, 격리, 접근금지 조치를 명령할 수 있다. 스토킹처벌법도 피해자에 대한 위해 가능성이 높은 경우 경찰과 검찰이 유치 처분이나 구속 수사를 신청·청구할 수 있다.
교제폭력의 경우 관련 법안이 발의돼도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21대 국회에서도 교제폭력 범죄에 임시 조치 등 피해자 보호 제도를 적용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가정폭력 처벌 특례법 일부 개정안’ 등이 세 차례 발의됐지만 폐기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교제폭력은 별도의 보호 규정이 없고, 반의사불벌죄 규정도 없다”며 “가해자가 협박하는 경우 보복에 대한 불안감으로 처벌불원 의사를 밝히는 경우가 많다. 관련 법안 마련이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독일은 가정폭력 안에 교제폭력을 포함해 피해자를 보호하고, 일본은 법적으로 등록되지 않은 교제 관계에서의 폭력도 ‘배우자의 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적용한다. 김영식 서원대 경찰학부 교수는 “교제폭력은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 관계성 부분에 초점을 맞춰 가해자의 구속 요건을 달리하거나 가중 처벌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교제폭력으로 검거된 피의자 수는 2020년 8951명에서 지난해 1만 3939명으로 해마다 증가했다. 올해 1~3월은 3157명이 검거됐다. 하지만 교제폭력으로 구속된 피의자는 2%대에 그치고 있다.
게다가 교제폭력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잖다. 교제살인을 포함해 배우자 등에 의한 살인에 대한 정부 공식 통계는 없다. 다만 한국여성의전화는 언론 보도 사건 등을 분석해 지난해 배우자와 연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해 살해된 여성이 최소 138명에 이른다고 발표한 바 있다.
강남 교제살인의 피의자 최모(25)씨는 이날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심사)을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면서 ‘유족에게 할 말이 없느냐’는 질문에 “죄송하다”고 답했다. 경찰은 부검을 통해 피해자의 사인이 흉기에 찔린 출혈이라고 판단했다. 최씨가 수능 만점을 받은 서울 유명 대학 의대생으로 밝혀지면서 최씨뿐 아니라 피해자의 신상 정보까지 온라인상에 빠르게 퍼지며 2차 가해 우려도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