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가 만들어준 우연… “세계 톱3가 목표”
김준오 브이씨(VC) 대표가 서울 강남구 본사 1층의 전시장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겨레 김창금 선임기자
노트북보다 작은 기기에 첨단기술이 망라돼 있다. 일종의 휴대용 레이더다. 포착하는 대상은 미사일이 아니다. 골프공의 궤적과 회전량, 발사각 등 모든 정보를 빛의 속도로 추적한다. 2014년 출시한 보이스캐디의 골프 론치모니터 ‘스윙캐디’ 시리즈(SC1~4) 얘기다. 2024년 여름에는 모델의 다섯 번째 버전(SCX)으로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한판 승부를 벼른다. 전체 직원의 절반이 연구 인력인 토종 강소기업 브이씨(VC)의 김준오 대표의 꿈이 영글고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UCLA) 공학박사 출신인 김준오 대표는 반도체 전문가다. 2005년 반도체설계 스타트업을 세울 때만 해도 골프 기업 운영은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골프장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만든 거리측정 음성기기 ‘보이스캐디’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인생 항로가 바뀌었다. 그는 “삶은 우연의 연속이고, 수많은 갈림길이 있다. 결과적으로 나는 기업 간 비투비(B2B)보다는 소비자의 고민을 해결하는 비투시(B2C) 사업이 좋다”고 말했다.
브이씨의 제품엔 레이더, 지피에스(GPS), 레이저 등 방위산업을 연상시키는 기술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 기술은 브이씨를 통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트렌드에 민감하고, 최고 성능과 가성비를 갖춘 제품을 내놔야 한다. 그 바탕에 ‘기술 기반 경영’이라는 김준오 대표의 철학이 있다.
‘기술 집착’ 장기 구상 먹혀
연구개발 투자는 비용이고, 시차를 발생시킨다. 영업이익과 기업공시에도 영향을 준다. 하지만 김 대표는 “기술 우월성에 진심인 회사를 만들고 싶다. 영업력에 앞서 탄탄한 기술력이 내재화돼야 한다”고 말한다. 동종 업계의 부침을 지켜보면서 이런 신념은 더 확고해졌다. 가령 레이저 측정기 기술을 중국 업체에 많이 의존한다면, 그 부문에서 결코 1등을 할 수 없다.
김 대표는 “단기적으로 기술을 빌려오고, 외주에 의존한 채 디자인에만 신경 쓰면 도태된다”고 강조한다. 공학박사 6명과 석사 10명 등 선임 연구원을 포함해 70여 명의 직원이 기술개발에 땀을 쏟는 이유다. 시계형 거리측정기의 시장점유율 국내 1위, 세계 최초의 GPS-레이저 하이브리드 측정기 개발, 국내 300개 안팎 골프장의 실시간 핀위치 서비스(APL) 제공 등 차별화는 이런 환경에서 나왔다.
김준오 브이씨(VC) 대표가 서울 강남구 본사 1층의 전시장에서 퍼팅 시범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창금 선임기자
마케팅 표적을 정교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최신 버전인 론치모니터 스윙캐디4(SC4)는 노트북보다 작은 크기의 기기로 온갖 정보를 알려주는데, 차고나 정원 등에 연습장을 설치할 수 있는 미국의 ‘홈 골프’ 고객을 겨냥했다. 가격대도 60만~70만원이어서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 이어 2024년 여름엔 기능을 보강한 500만원대 스윙캐디의 또 다른 신제품(SCX)을 내놓을 계획이다. 남자 미국프로골프(PGA) 선수들이 투어 경기 때 많이 들고 다니는 이 부문 선두 트랙맨의 제품보다 5분의1~6분의1 가격이어서 한판 승부를 기대한다.
국내 거리측정기 시장은 시계와 레이저 형태가 주류다. 브이씨는 시계 버전인 T시리즈로 국내 시장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지금까지 11번째 신제품을 냈는데, 그린의 높낮이를 반영하고(T3), 핀의 위치를 알려주며(T7), 지형에 따라 홀컵 좌우의 겨냥점을 지시하는(T11) 수준으로 발전해왔다. 김 대표는 “국내 최초로 시계형 측정기를 내놨듯이, 우리가 늘 표준을 만든다고 자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만족할 수 없다. 지금도 풍향과 풍속, 스윙 템포 비교 등의 데이터를 축적하고 앱으로 제공해주지만, 바람 정보를 플레이어가 원하는 그래픽 형태로 표시하는 등 편의성을 높이는 고도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직원들의 원시적인 발품은 업데이트를 위해 첨단 데이터와 절묘하게 결합된다. 김 대표는 “하드웨어 장비로 시작했지만,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서비스 등 소프트웨어 기반 플랫폼 사업을 강화해가고 있다”고 밝혔다.
매년 초 미국 올랜도에서 열리는 PGA머천다이징 쇼에 출품하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가전전시회(CES)를 견학하는 일은 김 대표가 빼놓지 않는 연례행사다. 그는 “삼성이나 애플의 화려한 전시장도 있지만 훨씬 많은 중소기업이 참여한다. 다른 기술을 보면 골프와 접목할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수면으로 올라오지 않은 흥미로운 기술이 있으면 활용할 방법을 연구한다”고 설명했다.
중소 정보기술(IT) 기업으로서 기술개발 투자로 외부 변수에 대응하는 내성을 다져왔고, 누구나 골프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기업문화에서 나오는 직원들의 자발성도 큰 힘이다. 김 대표가 “영역별로 가민과 트랙만, 부쉬넬 등 다양한 경쟁사가 있지만 기술력에서 세계 톱3에 들어가도록 하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이유다.
“한 타 더 줄인다면 그게 행복”
커뮤니케이션 학자 마셜 매클루언은 일찍이 인간의 정신과 신체를 확장한 모든 것을 미디어로 보고, 새로운 미디어가 인간관계나 질서를 바꾼다고 말한 바 있다. 특히 전기·전자 시대의 미디어는 기존 선형적인 인쇄문화 코드와는 다른 다양성을 불러온다고 봤다. 보이스캐디 등 거리 측정 기기의 도입도 캐디와 골퍼의 관계를 바꾼다. 초기엔 새로운 기술 도입으로 일자리 위협을 느꼈던 캐디들은 거리측정기를 통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맞지 않을 때 캐디 탓 하던 내장객과의 관계를 재설정했다. 골프장과의 관계에서도 수평적 윈윈 틀이 만들어지고 있다. 골프장 업주들은 핀에 달린 브이씨의 GPS 시스템을 활용해 그린 홀컵 위치 변동의 데이터를 받고, 이를 통해 초록 잔디를 좀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됐다.
역사에는 정해진 경로가 없고, 파생기술을 뜻하는 스핀오프가 새로운 소비재에 채용되면서 라이프스타일을 바꾼 예는 많다. 2011년 음성 거리측정기 첫 제품으로 스포츠 산업계의 주목을 끈 김 대표는 이후 13년간 혁신적인 제품군을 양산했고, 2022년엔 1천만달러 수출상을 받았다. 선수나 주말 골퍼들이 ‘한 타만 더 줄일 수 있다면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달려온 외길이었다. 그렇다면 김준오 대표는 만족할까. 그는 “돈만 생각하면 일이 재미없다. 골퍼들에게 새로운 경험, 새로운 기쁨을 주는 게 행복하다”고 했다.
김창금 한겨레 선임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