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이 사람을 죽일 때와 살릴 때
불법 추심 일당이 피해자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피해자 제공
“내 얼굴이 나온 나체 사진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뿌려지는 데는 몇 초면 충분한데, 범인 잡는 건 신고부터 재판 시작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불법 추심 피해자가 가해자 일당의 첫 재판에 참석해 밝힌 소감이다. “이 과정을 견디지 못해 신고를 꺼리는 피해자가 많을 것”이라는 나름의 분석도 더했다. 다른 피해자는 “(일당이) 카카오톡 단체방에 (내) 지인을 모두 초대해 내 얼굴과 남성 주요 부분을 합성한 사진을 뿌렸다. 죽고 싶다는 말이 체감됐다”고 털어놓았다.
한국일보가 최근 만난 불법 사금융 추심 피해자 10명의 증언은 사태의 심각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지난해 불법 추심에 시달린 8만 명(금융위원회 추산) 중 극히 일부임에도 그렇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해 업자에게 빌린 20만 원이 6개월 뒤 4,000만 원의 빚으로 불었다는 한 엄마는 돈도 돈이지만 딸 걱정에 우울증 약을 복용한다고 호소했다. 일당이 고등학생 딸의 담임교사와 친구 엄마에게 전화해 대출 사실을 알렸기 때문이다.
연리 4,562%, 시도 때도 없는 협박, 성 착취, 인권 말살, 가족 붕괴, 사회관계 파탄… 상식을 조롱하는 불법 추심이 “죽고 싶은 고통”이라는 피해자들의 절규에 공감하게 된다. “약자의 피를 빠는 악질적 범죄”라는 지난해 대통령의 일갈도 적절하다. 보도에 제보도 뒤이었다.
강력한 처벌, 양형 기준 상향 등 법 개정은 당연하다. 정부를 비웃듯 여전히 활개 치는 불법 추심을 발근하는 작업은 피해자의 토로를 경청하는 기본부터 다져야 한다. “애초에 왜 그런 데서 돈을 빌렸냐”는 투의 반응은 곤란하다. 피해 사실을 고백하는 부끄러움, 범죄에 일조했다는 두려움은 범죄자들이 노리는 바다. “돈 빌려주는 곳이 없었다”, “법은 멀고 협박은 가깝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피해자의 하소연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얘기다.
본보가 언급했듯 예방 교육과 더불어 복지와 정책금융의 역할 역시 강화해야 한다. 불법 사금융 척결 범정부 태스크포스는 부처 간 칸막이를 더 허물어야 한다. 비대면, SNS, 고금리 등 약한 고리를 파고들며 진화하는 악질 추심은 금융당국 설명처럼 “사실상 전체 정부가 함께 팔 걷고 나서 대처해야 하는 문제”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얼마 전 착수한 금융감독원의 ‘반사회적 대부계약 무효 소송’ 지원 사업이 반갑다.
결은 다르지만 돈거래 하면 떠오르는 사연이 있다. 상식을 조롱하는 불법 추심과 달리 상식을 유쾌하게 뒤집는, 아직 살 만한 세상임을 입증하는 얘기(본보 2019년 11월 19일 자 8면)다.
권두우씨는 보육원에서 자란 요보호 아동(고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2004년 호주로 떠났다. 손창건씨 밑에서 일하며 부족한 학비를 빌렸다. 형편이 더 나빠져 빚을 갚지 못하고 처가가 있는 인도네시아로 옮겼다. 2019년 권씨는 가족까지 대동하고 구태여 호주에 갔다. 10여 년 만에 만난 두 사내의 대화는 대략 이렇다.
권: “2,000만 원 빚 갚으러 왔습니다.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손: “내가 언제 갚으라고 했나, 안 받으려네.”
권: “제가 꼭 갚는다고 했습니다. 받아 주세요.”
손: “그럼 줘 보게.” (돈을 받자마자 돌려주며) “자. 받게나. 자네 가족에게 주는 내 선물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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