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대법원이 또 킹메이커?…트럼프, ‘사법부 보수화’ 열매 따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대선 출마 자격에 대한 판결이 나온 4일 한 워싱턴 시민이 연방대법원 앞에서 그를 히틀러에 빗댄 사진을 들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연방대법원이 또 미국 정치와 민주주의의 ‘운명’을 좌우할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 자격을 박탈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 미국 연방대법원이 대선 향배에 미칠 영향이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9인의 대법관, 그중에서도 보수 성향 6인이 2000년에 사실상 ‘킹메이커’를 한 연방대법원의 역할을 할지가 핵심이다.
연방대법원은 4일 ‘공직에 있을 때 반란에 가담한 자는 다시 공직을 맡을 수 없다’는 수정헌법 조항에 따라 트럼프 전 대통령이 주 공화당 경선에 나설 수 없다고 한 콜로라도주 대법원 판결을 무효화했다. 연방대법원은 “주들은 연방정부 관리들에 대해 수정헌법 제14조 제3항을 적용할 권한을 갖지 못하며, 대통령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고 만장일치로 판단했다. 다만 진보 성향 대법관 3명과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은 다른 대법관 5명이 의회가 입법으로만 수정헌법 적용 기준과 방식을 정할 수 있다고 한 대목에는 연방 차원의 개입 권한을 축소한다며 반대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21년 ‘1·6 의사당 난동’ 때 마이크 펜스 당시 부통령에게 의회의 대선 선거인단 투표 인증을 거부하라고 압박하고 지지자들에게 의사당으로 쳐들어가도록 사주했다. 콜로라도주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반란에 가담한 그는 출마 자격이 없다고 판결했고, 메인주와 일리노이주에서도 같은 결정이 나왔다. 하지만 콜로라도 등 15개 주가 프라이머리(예비선거)를 치르는 ‘슈퍼 화요일’ 전날 나온 판결로 자격 시비가 완전히 해소됐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국을 위한 큰 승리”라고 반응했다.
연방대법원은 의사당 난동 사태로 기소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면책권 주장도 심리해 계속 대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구두변론을 4월 말에 진행하기로 한 연방대법원의 판단 전까지는 워싱턴 연방지방법원의 본안 재판이 중단된다. 이런 일정이라면 연방대법원 결론은 6~7월에야 나오고, 본안 재판은 9월에야 재개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가 11월5일 대선 전에 유죄를 선고받을지는 유권자들의 선택에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이는 상황이다. 한 7대 경합주 여론조사에서는 53%가 유죄가 선고되면 그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연방대법원은 항소법원 재판부가 만장일치로 기각한 면책권 주장을 구두변론 없이도 판단할 수 있지만 여유 있게 구두변론 일정을 잡았다. 본안 재판의 조속한 재개를 원하는 민주당은 속이 타는 상황이다.
연방대법원이 대선에서 결정적 행위자로 등장한 것은 공화당의 조지 부시 전 대통령과 민주당의 앨 고어 전 부통령이 맞붙은 2000년 대선 이래 처음이다. 당시 플로리다주에서 불과 1784표 차이로 진 고어 전 부통령은 재검표를 요구했고, 기계 재검표에서 537표 차이로 줄었다. 투개표 시스템 결함을 감안하면 승산이 충분하다고 본 고어 전 부통령은 개표 기간 연장을 통한 수검표를 요구해 플로리다주 대법원이 수용했다. 하지만 5 대 4로 보수 우위인 연방대법원이 이를 번복해 부시 전 대통령이 승자로 확정됐다.
현재 연방대법원은 보수 6 대 진보 3 구도로 이례적으로 불균형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집권 때 종신직인 대법관을 3명이나 지명해 이런 구도를 만들어놨다. 그는 2020년 대선 직후 패배한 5개 주 선거 결과에 대해 연방대법원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바 있다. 하지만 다시 최고 법원의 ‘우호적 환경’에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민사사건에서 대출 사기와 명예훼손을 이유로 선고받은 4억3700만달러(약 5800억원)의 벌금 및 배상금 문제를 결국 연방대법원에 호소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그는 이번 판결에 사의를 표하며 “대법관들이 그들의 일을 하도록 허용되지 않으면 나라에 끔찍한 일이 될 것”이라는 압박성 발언도 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치 뉴요커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이기려고 무슨 짓이든 할 것이며, 선거 결과가 어떻든 이의를 제기할 것”이라고 했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