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생산라인 [삼성전자 제공] |
‘칩(Chip)만사(萬事)’
마냥 어려울 것 같은 반도체에도 누구나 공감할 ‘세상만사’가 있습니다.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 주요 국가들의 전쟁터가 된 반도체 시장. 그 안의 말랑말랑한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촌각을 다투는 트렌드 이슈까지, ‘칩만사’가 세상만사 전하듯 쉽게 알려드립니다.
[헤럴드경제=김민지 기자] “경력 채용에는 너도나도 몰리는데…정작 10년 뒤 일할 ‘씨앗이 없다?”
삼성전자 반도체가 역대급 경력 채용을 시작했습니다. 올해 메모리 시장이 다시 반등할 것이 유력한 가운데, 공격적으로 인력 확보에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지난해부터 대폭으로 채용 인원을 확대한 어드밴스트패키징(AVP)사업팀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AVP사업팀은 지난해 신입과 경력을 합쳐 세자릿수 채용을 진행했는데, 약 900명이 넘는 직원을 뽑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런데 정작 반도체 계약학과는 홀대 받고 있습니다. 삼성과 SK하이닉스 채용이 보장된 곳들마저 미등록률이 절반이 넘습니다. 반도체가 한국 산업을 책임지는 핵심전략산업임에도, 앞으로 10년 뒤 일할 사람이 극도로 부족할 것이란 우려가 나옵니다.
1년에 1000명씩 뽑는다…패키징 경력 인재 ‘블랙홀’ 된 삼성
삼성전자는 반도체는 지난 14일부터 오는 20일까지 경력 사원 채용에 들어갔습니다. 모집 직무만 무려 800여개로, 엄청난 규모입니다.
절대적인 채용 인원수는 메모리·파운드리 사업부가 가장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메모리사업부에서는 차세대 플래시 공정·소자 기술 개발, 차세대 D램 솔루션 제품 컨트롤러 개발·검증, CXL(컴퓨트 익스프레스 링크) 제품 개발 등의 직무를 수행할 인재를 모집합니다. 파운드리사업부는 eM램·e플래시 제품을 위한 공정 개발, 수율 분석, 파운드리 제품 불량 해결 등을 수행할 경력사원을 찾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부터 급격하게 채용 인원을 늘린 패키징 분야에 대한 관심이 유독 높습니다.
2022년 12월 신설된 AVP사업팀은 지난해 하반기에 이어 이번에도 세자릿수 채용을 이어갈 전망입니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에 입사한 인원만 900여명에 달합니다. 현재 인력 규모는 1600여명으로 파악되는데, 이를 올해 말까지 3000명까지 늘릴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국내 주요 반도체 패키징, 설계 및 테스트 서비스(OSAT) 기업에서 대거 경력직 인재를 채용하고 있습니다. 인력을 빨아들이는 속도가 어찌나 공격적인지 마치 ‘블랙홀’ 같다는 후문도 나옵니다.
국내 패키징 업계 관계자는 “메모리 반도체에서 패키징의 중요도가 높아지면서 삼성과 SK하이닉스 모두 후공정 인재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며 “중견 패키징 업체에선 ‘대기업이 다 데려가서 일할 사람이 너무 없다’라는 한탄이 나올 정도로 이직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삼성전자가 AVP사업팀 인력을 대폭 늘리는 이유는 향후 후공정 및 패키징 기술이 반도체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공정에서 선폭을 줄이는 미세화가 한계에 도달하면서, 반도체 칩을 쌓고 조립하는 패키징의 중요성이 높아졌습니다. 시장조사업체 욜디벨롭먼트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지난해 최첨단 패키징 투자액은 18억달러(약 2조4000억원)로 추산됩니다.
지난해 뜨거운 감자였던 HBM(고대역폭메모리) 역시 여러 개의 D램을 실리콘관통전극(TSV) 기술로 쌓아서 만듭니다. 삼성은 메모리와 시스템반도체를 수평으로 배열하는 ‘2.5D 패키징’ 뿐 아니라 수직 구조의 ‘3D 패키징’ 등 미래 기술 혁신에 집중해 고부가가치 메모리 시장에서 선두를 차지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채용 보장에도 90% 이탈…“기술 인재 대우 분위기 중요”
이처럼 삼성전자로 이직하기 위한 업계 경력자들의 열기는 뜨거운 데 반해, 대학가의 반도체학과 분위기는 싸늘합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채용이 보장된 계약학과 마저 수험생들의 외면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 종로학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삼성전자 계약학과인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는 정시 최초합격자 25명 중 23명(92%)이, 고려대 차세대 통신학과는 최초합격자 10명 중 7명(70%)이 미등록 했습니다. SK하이닉스 연계 계약학과인 고려대 반도체공학과는 10명 중 절반인 5명이, LG디스플레이 연계인 연세대 디스플레이융합공학과는 7명 중 3명(42.9%)이 빠져나갔습니다.
반도체 외면에는 ‘의대 열풍’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부가 2025학년도부터 의과대학 입학정원을 2000명씩 늘리겠다는 계획을 밝히면서, 공대 대신 의대로 학생들이 몰린 겁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사회 전반적으로 기술 인재를 더욱 대우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쉽게 말해서 보상, 처우, 명예 측면에서 ‘의사되는 것보다 반도체 전문가가 되는 것이 더 좋다’라는 인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한국에서는 사라졌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반도체 경쟁국인 대만, 미국, 일본, 중국 등에서는 기술 전문가를 매우 대우해준다”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공계 인재가 사명감을 가질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오는 2031년 국내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인력은 30만4000명인데 반해, 5만4000명의 공급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특히, 반도체 기술이 점차 고도화되면서 석·박사 인재가 더욱 필요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국내 대학원에서 배출하는 반도체 석박사 인력은 연간 150여명으로 경쟁국들과 비교하면 매우 미비한 수준입니다.
한편, 윤석열 대통령은 16일 국가연구개발에 참여하는 이공계 석·박사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석사는 매월 80만원, 박사는 매월 최소 110만원을 빠짐없이 지원하겠다는 방침입니다. 의대 쏠림을 막고 이공계 인재 대우를 높이기 위해서는 정부와 학계, 기업의 전반적인 협업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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