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부터 ‘화려한 휴가’까지…미국은 ‘국익’ 따지며 보고 있었다

‘서울의 봄’부터 ‘화려한 휴가’까지…미국은 ‘국익’ 따지며 보고 있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지난해 말 출간한 ‘5·18민주화운동기록물자료총서’ 5~7권. 12·12부터 5·18까지 한국의 정치적 격변기에 미국 정보기관들이 본국과 주고받았던 비밀문서들 중 중요 내용을 추려 일목요연하게 편집한 첫 우리말 번역본이다. 이정용 선임기자

영화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은 1979년 12·12 군사 반란 당일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길고도 긴박했던 아홉시간을 재구성했다. 지난해 11월22일 개봉한 지 불과 한달 만에 관객 1천만명, 다시 한달이 지난 1월27일에 1300만명을 넘어섰다. 한국 영화사상 다섯번째 기록이다. 중장년층뿐 아니라 12·12 이후 태어난 2030세대가 흥행을 주도했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인데다 답답함과 울분이 치솟는 영화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현상은 이례적이었다.

1979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한국의 정국은 문자 그대로 격랑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10·26)과 유신 독재의 종말, 전두환의 군사 반란, 폭발적인 민주화 열망, 신군부의 광주 학살(5·18)과 집권까지 숨 가쁘게 이어졌다. 전두환과 신군부 일당은 빠르게 권력을 장악했고, 정부는 군부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1980년 5월17일 저녁, 국무회의는 군부의 각본대로 비상계엄 전국 확대(자정 발효)를 의결했다. 전국의 대학교에 휴교령을 내렸고, 주요 도시의 대학들에는 계엄군이 배치됐다. 바로 다음날, 반란군은 광주에서 권력 찬탈의 핏빛 마침표를 찍을 ‘화려한 휴가’(작전명)를 시작했다. 이 모든 과정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지켜본 집단이 있었다. 미국이다. 주한 미국대사관과 미군 정보기관들은 한국의 정치적 격변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거의 실시간으로 본국에 보고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하 5·18기록관)이 지난해 말 출간한 ‘5·18민주화운동기록물자료총서’(이하 총서) 5~7권은 한국의 격변 상황에 대한 미국의 시각과 대응을 날것으로 보여준다. 1979년 10·26 직후 미국은 긴급히 한국 관련 정책검토위원회(PRC)를 구성하고 관련 기관들이 민감한 정보를 작성·공유했다. 미국의 탐사보도 전문 기자 팀 셔록은 1993~1995년 사이에 비밀 해제된 미국 정부기관 문서들을 입수해 세상에 처음 알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한국에도 일부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긴 했지만,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우리말 번역본으로 묶여 나온 것은 처음이다.

‘서울의 봄’부터 ‘화려한 휴가’까지…미국은 ‘국익’ 따지며 보고 있었다

‘5·18민주화운동기록물자료총서’를 감수한 이재의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전문위원이 지난달 30일 광주광역시 국립 5·18민주묘지 내 5·18추모관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셔록은 백악관·국무부·국방부·국방정보국(DIA)·중앙정보국(CIA)과 주한 미국대사관 등이 작성한 문서들을 주제와 시기별로 분류했고, 2017년 기록관에 모두 기증했다. 16개 상자, 문서 1256건, 3530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기록관은 곧바로 전문 번역을 시작했고, 셔록의 분류를 기본으로 편집과 감수를 거쳐 세권의 책으로 발간했다. 왼쪽 지면에 미국 문서 원본 사진을, 오른쪽에는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번역문을 나란히 실었다.

첫번째에 해당하는 제5권 ‘미국이 바라본 5·18 민주화운동의 서막’은 12·12 직후부터 5·18 직전까지 관련 문서들을 수록했다. 제6권 ‘미 국방정보국(DIA), 5·18을 목격하다’에는 광주항쟁 시기인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 미국 국방정보국이 작성한 문서들만 추려 모았다. 제7권 ‘5·18과 다양한 시선들’에는 국무부, 주한 미국대사관, 백악관, 미국 중앙정보국 등 미국의 핵심 기관이 5·18 당시 한국의 전반적인 상황과 동아시아 정세까지 판단한 문서들을 편집했다.

‘서울의 봄’부터 ‘화려한 휴가’까지…미국은 ‘국익’ 따지며 보고 있었다

‘5·18민주화운동기록물자료총서’는 비밀해제된 미국 정보기관들이 본국과 주고받았던 비밀문서들을 원문 양식과 문장 그대로 직역해 편집했다. 여전히 곳곳에 삭제된 미공개 내용들이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12·12 이후 군 내 하나회 제거 계획도

책에는 지금껏 널리 알려지지 않은 비화를 비롯해 주목할 만한 내용이 많다. 미국은 12·12의 첫 순간부터 사태를 면밀히 지켜보고 그 의미까지 간파하고 있었다. 이날 저녁 미 국무부가 백악관, 주한 미국대사관, 주한 유엔군사령관(미군), 미 국방부 등을 수신처로 보낸 ‘한국에서 군부의 실력행사 발생’ 문서의 일부 항목을 보자.

“ 3. 서울 시각으로 12월 12일 초저녁, 전두환 보안사령관 및 (…) 일단의 한국군 장교들이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정승화 장군을 체포하고(…), 그 과정에서 서울 남부 중심지(용산)에서 몇 발의 총성이 들렸으나 사망자는 아직 보고되지 않았음.”

“6. 초기 쿠데타 세력으로부터 3개 요구조건이 비밀리에 전달되었음. 계엄사령관 교체, 제3군사령관 교체, 그리고 조금은 중요도가 떨어지는 직위자 한명의 교체였음. 이 요구조건들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계엄사령관 임명을 지시한다는 것은 중대한 권력 장악을 의미하는 것임.”

12·12 이후 한국 군부 안에서 전두환 파벌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보고도 흥미롭다. 1980년 1월9일 미 국방정보국 정보요원이 작성한 ‘첩보’ 문건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다.

“A. 한국공군 및 해군의 일부 고위 멤버들이 1979년 12월 13일 육군의 권력 장악 사건을 주도한 전두환 소장이 사임하거나 어떤 형태로든 권력이 억제되지 않으면 그와 그의 파벌에 대한 대응을 고려하고 있다 함. (…) 이들은 전두환이 계속해서 최규하 정부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다면 해병대를 동원하여 그 파벌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수립 중이라고 말했다 함.”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 실무진의 최고위직인 리처드 홀브룩 국무부 동아시아 차관보와 긴밀하게 연락하며 자신의 의견도 덧붙였다. 글라이스틴은 12·12 쿠데타 직후 한동안 전두환과의 면담조차 꺼리며 신군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감추지 않았다. 전두환의 행태에 우려를 표명하고 모든 정치세력의 자제를 촉구하는 의견도 수차례 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악화하는 상황에 끌려가다가 결국은 ‘한국의 안정’과 ‘미국의 이익’을 위해 전두환 군부를 인정하는 쪽으로 기우는 모습을 보였다. 그 대부분은 결과적으로 미국의 정책에 반영됐다.

글라이스틴은 1980년 1월9일 ‘정책 판단’ 보고에 “한국에 대한 기본적인 미국의 이해관계는 변함이 없지만 (…) 전례 없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음. (…) 한국 사회 각 분야에서 우리의 지원을 필요로 하는 집단들에게 해도 욕먹고, 안 해도 욕먹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임”이라고 썼다.

‘서울의 봄’부터 ‘화려한 휴가’까지…미국은 ‘국익’ 따지며 보고 있었다

2017년 4월 미국 언론인 팀 셔록(오른쪽 둘째)이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윤장현 당시 광주시장(왼쪽 둘째)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입수해 광주에 기증한 미국의 비밀해제 문서를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의 봄’부터 ‘화려한 휴가’까지…미국은 ‘국익’ 따지며 보고 있었다

2023년 4월 미국 탐사보도전문기자 팀 셔록이 서울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email protected]

신군부, 북의 남침 가능성 부풀리고…

‘서울의 봄’이 좌절되고 신군부의 권력 장악 시나리오가 막판으로 치닫던 1980년 5월7일, 글라이스틴은 홀브룩에게 ‘한국 문제: 비공식 정책검토’라는 제목의 전문을 보냈다. 핵심은 이렇다. “(A)우리의 기본적인 정치 분야 목표는 정치적 안정 유지에 필요한 긴장 완화가 어느 정도 될 수 있도록 지원하되, 긴장 완화의 수준과 방법은 한국인들에게 맡겨 놓고, (B)전두환과 관련한 우리의 목표는 그가 한국인들―그리고 한국군―이 용인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속도를 늦추는 것임.”

이날과 그 다음날 글라이스틴과 미국 국무부가 주고받은 전문은 미국이 전두환 신군부의 시민 유혈진압을 묵인할 수도 있음을 내비친 것으로 주목된다. 5월7일 글라이스틴은 홀브룩에게 보낸 또 다른 전문 ‘한국 정부, 특수부대 이동’에 이렇게 썼다.

“2. 한국군은 비상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병력을 이동시킨다고 미군 지휘부에 통보하였음. 5월 8일, 제13공수여단을 서울 남동쪽 특수전센터로 이동. 5월 10일, 제11공수여단을 김포반도로 이동, (…) 제1공수여단과 함께 배치.

3. 미군 지휘부는 포항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대 제1사단이 대전/부산 지역에 필요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음. 해병대 제1사단은 연합사 작전통제 병력이며 이동을 위해서는 미국의 승인이 필요함. (…) 유엔군사령관은 요청이 있을 경우 승인할 계획임.”

다음날인 5월8일 미국 국무부는 홀브룩의 직속상관인 워런 크리스토퍼 동아시아 차관 명의로 한국의 글라이스틴에게 보낸 전문에 “한국 정부의 긴급 비상계획에 반대해서는 안 된다”고 화답했다. 이에 대해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이재의 전문위원은 “미국이 전두환 신군부가 민주화 시위 진압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을 내부적으로 공식화한 최초의 문서로 봐도 된다”며 “(한국의 정변 사태에 대한 미국의 태도에서) 가장 중대한 변곡점”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글라이스틴이 다음날인 5월9일 전두환을 만나 미국의 방침을 말하자 전두환이 쾌재를 불렀다. 5월10일에는 전두환 쪽이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를 통해 ‘북한군의 남침 가능성’을 언급한 일본의 문건을 입수하고 이를 부풀려 5월12일 국무회의 때 신현확 총리에게 보고했다. 그때부터 정부 쪽도 ‘시위를 마냥 방치할 수는 없지 않으냐’는 쪽으로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글라이스틴과 미 국무부는 그 뒤로도 긴밀한 정보 교환과 의견 조율을 이어갔다.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1980년 5월17일, 글라이스틴은 ‘서울에서 탄압 사태 발생’이라는 제목의 전문을 본국에 보냈다.

“2. 한국 군부는 (삭제) 한국 정부의 합법적인 권한을 무시한 채 학생들 및 정치권 전반에 걸쳐 강경한 탄압을 시작하였음. 군부의 완전한 실권 장악이 진행되고 있는 듯함.

3. (…) 한국 전체로 “비상 계엄령”이 확대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음. 이는 절차적으로는 계엄사령관이 국방장관이 아닌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군부가 보다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함.

4. 우리는 이러한 결정에 대해 절대로 통보를 받은 바 없음. (…) 군부 지도자들은 학생들에 대한 정부의 정책이 너무 부드러웠다며 극도로 불만을 갖고 있다 함.

9. (…) 우리가 공개 성명을 발표하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 최규하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 계엄사령관에게 본직이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대표하여 얘기할 수 있도록 최고위층으로부터의 지침을 내려주시기 바람.”

글라이스틴이 요청한 ‘지침’은 바로 다음날인 5월18일 오후 1시(미국 동부시각) 국무부 대변인 명의의 성명서로 발표됐다.

“한국 전역으로 계엄령이 확대된 것과 대학 폐쇄, 그리고 일부 정치 및 학생 지도자들이 체포된 것에 깊은 우려를 표명함. (…) 우리는 한국 내 모든 세력이 어려운 상황에서 자제를 갖고 행동하기를 촉구함. (…) 미국 정부는 조약상의 의무에 따라 한국의 현재 상황을 악용하려는 그 어떠한 외부 시도에도 강력히 대응할 것임.”

‘서울의 봄’부터 ‘화려한 휴가’까지…미국은 ‘국익’ 따지며 보고 있었다

지난달 30일 광주광역시 국립 5·18민주묘지 내 5·18추모관에서 한 관람객이 사진과 유품들을 보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미 ‘광주 상황 문건’, 보안사 기록과 비슷

그러나 미국의 모호한 판단과 대응은 전두환 신군부에는 행동의 족쇄를 풀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5월18일 새벽 1시께 보안사령부(사령관 전두환)는 김대중·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을 전격 체포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점령했다. 이날 아침에는 광주 전남대에서 학생들과 계엄군 사이에 벌어진 충돌이 불과 몇 시간 만에 광주 시민과 신군부의 전면 대결로 확대됐다. 학생과 시민을 가리지 않은 계엄군의 무자비한 시위 진압과 만행이 불을 댕겼다. 그렇게 광주항쟁이 시작됐다.

5·18기록관은 이번 자료 총서 중 두번째 권에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의 광주항쟁을 중심으로 미 국방정보국이 작성한 문서들만 선별해 수록했다. 정보 출처는 대부분 삭제됐다. 그러나 일부 문건은 한국군 내부의 협조자에게 확보했거나 한국군 정보기관의 자료를 거의 그대로 영문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특히 5월21일 낮 1시 계엄군이 전남도청 앞에서 시민에게 집단 발포한 사건을 생략한 채 그 45분 뒤부터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벌어진 상황을 5~10분 단위 실시간으로 촘촘하게 기록한 ‘광주폭동: 80년 5월 22일 10:00 현재 상황’은 당시 국군 보안사가 작성한 ‘일일 속보철’과 거의 비슷하다.

―13:45: 도청 앞에 집결한 폭도 중 30대 성인 몇 명이 확성기를 이용하여 “오늘 밤 우리의 공격 목표는 전투병과교육사령부와 보안부대다”라고 외쳤음. 모여 있던 군중들이 크게 환호하였음.

―15:05: 미상 숫자의 폭도들이 화순 무기고에서 40정의 무기를 탈취하여 광주로 향하였음.

―16:28: 폭도들이 광주시내에 있는 호남전기 무기고에서 카빈소총 150정과 실탄 900발을 탈취하였음.

―16:50: 도청에 주둔하고 있던 공수부대가 조선대학교로 철수하였음.

―17:50: 전남대학교에서 계엄군과 폭도 간 교전이 발생하였음. 조선대학교에서는 계엄군이 폭도에게 발포하였음.

―18:10: “이날 밤 교전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발표가 있었음.

―20:45: 광주공원과 무등경기장에 폭도들이 모여 (…) 21:30 도청을 무력으로 접수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음.

―00:15: 전투병과교육사령부가 부대로 향하는 접근로를 차단하였음.

―06:15: 광주시내의 높은 건물들은 무장한 폭도들에게 점령당하였음.

―09:45: 광주 지역의 폭도들이 공수부대의 광주 진입을 두려워해 완도 등 섬 지역으로 흩어질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었음.

‘서울의 봄’부터 ‘화려한 휴가’까지…미국은 ‘국익’ 따지며 보고 있었다

광주광역시의 옛 전남도청 앞 광장 건너편 전일빌딩245의 9층 전시관에는 1980년 5월 당시 광주 중심부 위로 군용 헬기가 날고 있는 모습을 재연한 축소 모형이 전시돼 있다. 전일빌딩245의 외벽과 실내에는 당시 계엄군의 헬기 기총사격 증언을 입증하는 탄흔 245개가 남아 있다. 광주광역시도시공사 누리집 갈무리.

‘서울의 봄’부터 ‘화려한 휴가’까지…미국은 ‘국익’ 따지며 보고 있었다

광주광역시의 옛 전남도청 앞 광장 건너편 전일빌딩245의 전경. 조일준 기자 [email protected]

또 다음날 작성된 ‘80년 5월 23일 12:00 광주 상황’ 문건에는 냉전 대결 시기 한국 군부와 미국의 반공·반북 이념을 그대로 옮겨놓은 섬뜩한 대목도 있다. “(…) 현재 상황은 여수 순천 반란사건과 유사함(원문 역자 주: 1948년에 발생한 사건임). 정부는 보다 적극적으로 강경하게 현재 상황을 진압해야 함.”

미국은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의 최후 항쟁을 진압하기 하루 전에 작전 계획을 미리 통보받았다. 5월26일 발신처가 삭제된 채 국방정보국 본부와 태평양공군사령부(하와이) 등을 수신처로 지정한 ‘광주에 대한 병력투입계획/서울에서 시위 가능성’ 보고의 일부 대목은 이렇다.

“광주시 외곽으로 병력이 진입하였고 소탕 및 정리작전을 개시하였음. 금일 밤 또는 내일 아침 일찍 폭도들을 체포하고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병력이 광주시내에 대규모로 진입할 계획임. (…) 폭도들은 상황 해결을 위한 민간 위원회에 무기를 반납하고 있음. 그러나 학생과 깡패들이 그 무기를 다시 가져갔음. 전라남도 출신 고려대 및 서울대생 대부분과 서울지역 다른 대학교에 있는 전라도 출신 학생들 다수가 광주로 내려갔음.”

계엄군이 전남도청의 최후 항쟁을 진압한 이틀 뒤인 5월29일, ‘광주사건 관련 북한의 의도 및 관점’이란 제목의 문서는 5·18 당시 북한 위협론이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 중장은 자신의 미래가 광주폭동의 성공적인 종결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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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부터 ‘화려한 휴가’까지…미국은 ‘국익’ 따지며 보고 있었다

2015년 5월 국립5·18민주묘지의 유영봉안소에서 한 참배객이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미, 광주 진압 지원 한국 국민에게 사과해야”

이번 총서 5~7권의 번역과 편집에 참여한 한 조사관은 “팀 셔록 기증 문서 전체를 번역하다 보니 큰 흐름이 보였다”고 말했다. “미국은 초기에 정보 파악이 잘 안됐고 혼란 상황에서 북한의 위협 가능성을 우려했어요. 당시 지미 카터 정부에서도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1순위가 ‘안정’, 그다음이 민주주의였습니다. 전두환을 지원하지 않지만 적극 말리지도 않고 방관하는 흐름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재판 때까지도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김대중에게 사형 선고(1981년 1월 대법원 확정)가 내려진 뒤로 ‘전두환 승인’과 ‘김대중의 생명’을 맞바꾸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죠. 전두환이 미국을 방문해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1981년 1월 취임)을 만나게 해준다는 약속이 그 신호였습니다.”

셔록은 이번 총서 발간 직후 이재의 전문위원에게 “내가 입수한 5·18 관련 문서들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한국의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되어 큰 영광”이라며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다. 그는 “1989년 한국 국회가 전두환의 광주 범죄에 대한 첫 청문회를 열었을 때, 미국의 조지 부시 정부는 1979~1980년 새 한국 정책에 관한 장문의 ‘백서’를 발표했는데, 내가 광주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와 모순이 많았다”고 돌이켰다. 셔록은 메시지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언젠가 미국 정부가 1980년 5월 전두환의 광주항쟁 진압을 지원한 것에 대해 한국 국민에게 공식 사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광주 시민 여러분께 경의를 표한다!”

조일준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한겨레S] 인터뷰

‘총서 감수’ 이재의 5·18 전문위원

“12·12가 어떻게 5·18로 연결됐는지에 초점”

“문건들, мЈјмќј 사령부·대사관 кіµмњ

동아시아 전략 일본 중심 드러내

배경과 맥락 모르면 이해 어려워

총서 독해 위한 가이드북도 쓸 것”

‘서울의 봄’부터 ‘화려한 휴가’까지…미국은 ‘국익’ 따지며 보고 있었다

이재의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전문위원이 지난달 30일 광주 5·18추모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12·12부터 5·18까지 미국이 한국의 정치적 격변을 지켜보고 논의한 비밀문서들을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정리해 우리말 번역본으로 출간하기까지는 이재의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전문위원의 힘이 컸다. 그는 이번 총서를 감수하고 서문을 썼다. 이 전문위원은 ‘오월 광주’의 진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출판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1985년, 황석영 기록, 풀빛 펴냄)의 실제 집필자이기도 하다. 흔히 ‘넘어 넘어’라는 약칭으로 불린다.

한겨레는 지난달 30일 광주시 동구 금남로 전일빌딩245 카페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전일빌딩245는 옛 전남도청 앞 광장 건너편에 있다. 1980년 5월 당시 주변에서는 최고층 건물이었다. 맨 위층인 10층의 외벽과 실내에서 총알 자국 245개가 발견되면서 빌딩 이름 뒤에 ‘245’라는 숫자가 붙었다. 이 탄흔은 5·18 당시 계엄군이 공중에서 헬기 사격을 했다는 다수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물증이 됐다.

―소설가 황석영의 이름으로 나온 ‘넘어 넘어’ 초판은 발간 즉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5·18 당시 나는 3년 군복무를 마치고 막 복학한 신분이어서, 첫 엿새 동안 피신하지 않고 광주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지켜봤다. 계엄군이 집단 발포 뒤 퇴각한 22, 23일에는 도청 상황실에서도 일한 덕분에 전체적인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광주항쟁이 진압된 뒤엔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을 계속 만들어 배포하다 체포돼 실형을 선고받고 이듬해(1981년) 8·15특사로 풀려났다. 그런데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취업도 못해 근근이 살다가 1984년 가을에 학적이 복적돼 복학했다. 그해 10월쯤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전청협)에서 광주항쟁의 진실을 기록으로 남기려는데 내가 적임자라며 집필을 제안했다. 당시 두달 뒤 결혼을 앞두고 있던 참에 이걸 쓰면 또 감옥행이 뻔해서 잠깐 고민을 했는데, 이게 역사적으로 너무 중요한 일이잖나. 그때까지는 군부의 기록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결국 신혼방이 ‘넘어 넘어’를 펴내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고 확인 취재를 하는 비밀 아지트가 됐다. 모두가 몇 달을 밤낮없이 매달린 끝에 1985년에 초고를 완성했는데, 광주의 이름 없는 청년들이 썼다고 하면 누가 믿겠나? 신분상의 위험도 컸다. 마침 그때 광주에 있던 황석영 작가가 원고들을 정리·편집하는 수고까지 맡아주면서 자기 이름을 기록자로 내세워줬다. 2017년 개정판에는 황석영·이재의·전용호까지 함께 작업한 3인의 이름이 들어갔다.”

‘서울의 봄’부터 ‘화려한 휴가’까지…미국은 ‘국익’ 따지며 보고 있었다

‘오월 광주’의 진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출판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1985년 초판, 황석영 기록, 풀빛 펴냄)의 2017년 개정판. 창비 제공

―이번 총서 발간의 의미는?

“1979~1980년 사이에 미국의 여러 기관이 한국 상황에 대한 정보와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문건들은 국내 공식 문서들이 많은 사실을 감추고 왜곡한 것과 달리 팩트에 충실하고 중요한 정보를 많이 담고 있다. 물론 철저히 미국의 시각으로 쓰였고 미국의 시각을 대변한다. 그런 점을 고려하고 본다면, 당시 미국의 태도와 정책까지 포함한 진실에 더 접근할 수 있다. 이번 총서는 1979년 12·12 반란이 어떻게 이듬해 5·18로 연결이 되는지, 전두환이 어떻게 실세로 등장해가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편집했다. 특히 이전까지는 일부 전문가나 연구자들만 부분적으로 볼 수 있었던 미국 문서들을 한데 모아 일반인들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했다는 게 중요하다.”

―특별히 눈여겨볼 만한 점이 있는가?

“문서마다 수신 기관과 배포처가 많은데, 긴급 정보들을 누가 공유하는지를 심히 봐야 한다. 주한 유엔군사령관, 미군 태평양 공군사령부(하와이), 미국 본토의 각군 참모총장, 일본 주재 미국대사관과 주일 미군사령부, 미국 국방부와 국무부가 주요 수신처 또는 참조기관으로 지정돼 있다. 팀 셔록도 차음엔 간과했다가 문서들을 계속 검토하고 분류하는 과정에서 이런 사실에 주목했다. 이 경로가 중요한 이유는, 한반도에서 미국의 모든 군사작전 계획은 미국이 일본에 제공하는 우산 아래에 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은 일본이 중심축이고 한국은 그다음, 전술적 배치로서의 위상이라는 거다.”

―당시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미국의 태도 변화의 과정과 이유를 총서에 실린 문서들로 알 수 있는가?

“전체 흐름을 보면, 리처드 홀브룩(당시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 차관보)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했다는 걸 알게 된다. 당시 홀브룩은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의 직속 상급자였는데, 둘은 호흡이 잘 맞았고 의견이 거의 일치했다. 홀브룩이 전두환을 밀어주자는 생각을 먼저 밝혔고 글라이스틴은 거기에 맞춰 계속 생각을 바꿔나갔다. 가장 결정적인 게 5월22일 백악관 상황실에서 열린 정책검토회의(PRC)다. 5·18 기간에 미국에서 광주 문제를 논의한 건 그게 유일하다. 국무장관, 국방장관, 국가안보보좌관, 중앙정보국(CIA) 국장, 합참 의장 등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을 총괄하는 최고위급 인사 15명이 참석했다. 홀브룩은 그 회의 직전까지 계속 글라이스틴에게 광주 상황을 묻고 의견을 나눴는데, 결국 둘의 판단이 일치하게 되는 식이다.”

2017년 광주 문화방송(MBC)은 그 회의 내용을 기록한 ‘닉 플랫 메모’를 입수해 단독 보도했다. 미국이 광주에서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계엄군의 무력 사용을 용인한 내용이 담겼다. 5·18기록관은 이번 총서 세번째 권에 그 원문을 수록했다. 백악관이 ‘결론 요약’이라는 제목으로 작성한 문서의 전문은 이렇다.

“현재 한국의 상황에 대한 전반적인 토의 결과, 향후 더 큰 불안의 씨앗을 뿌리지 않은 상태에서 최소한의 무력을 사용하여 한국 당국이 광주에서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음. 일단 질서가 회복된 다음 한국 정부, 특히 군부를 압박하여 보다 많은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였음. (2급 비밀)”

―총서가 미국 기관들이 작성한 문서들을 양식과 용어까지 직역한 것이라 이해하기 쉽지 않은 대목들이 많다.

“원본 문서들의 분량이 방대하다. 또 동일한 사안들을 미국의 여러 기관이 보고하다 보니까 겹치는 내용도 많다. 셔록이 자신이 입수한 모든 자료를 2017년에 광주에 기증하면서 나와 함께 두달간 분류 작업을 했다. 이번 총서도 그때 셔록이 분류한 기준을 기본으로 삼고 그중에도 5·18과 관련된 중요한 문서들을 선별해 재구성했다. 사건 발생의 배경과 의미까지 전체 맥락을 볼 줄 알아야 하는데, 그걸 총서 세권의 각 장의 해제에 담았다. 그와 별개로, 이 자료를 제대로 독해할 수 있도록 일종의 가이드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것까지 써야 할 것 같다.”

조일준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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