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타 100% 사망케한 '악마의사' "말 피 뽑아 인간에 주사했더니…"

세균무기를 개발한답시고 생체실험이란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1892-1959, 군의중장) 못지않은 ‘악마의 의사’가 2명 있다. △이시이에 이어 731부대장에 올랐던 키타노 마사지(北野政次, 1894-1986, 군의중장), △’군마방역’으로 위장한 관동군 100부대장 와카마쓰 유지로(若松有次郎, 1897-1977, 군의소장)이다.

이 둘은 이시이와 마찬가지로 1945년 패전 뒤 전범자로 체포될까 두려워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우곤 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를 곧바로 눈치 챘다. 세균전 관련 정보에 목말라 하는 미국의 모습을 보면서, 생존의 기회를 잡았다. 살아있는 사람을 ‘마루타'(통나무)로 일컬었던 생체 실험의 희생양으로 삼아야만 얻을 수 있는 ‘피 묻은’ 세균 자료들을 미국에 건네주며 ‘전쟁범죄자’ 꼬리를 뗐다.

1947년 말 맥아더사령부의 조사관들은 일본이 731부대를 중심으로 세균전을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끔찍한 생체실험으로 숱한 사람들이 ‘마루타’로 희생됐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됐다. 731부대의 지휘관들이 전쟁범죄자로 기소될 충분한 양의 범죄사실이 조사관들의 문서철에 기록됐다.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 (100부대장) 와카마쓰 유지로, (731부대장) 키타노 마사지 외 여러 세균전 주역들은 조사관들이 반복해서 묻는 질문에 거짓말과 기만, 은폐, 무시 등으로 이리저리 교묘하게 피해가며, 기소되지 않으려 갖은 애를 쓰고 썼다. 하지만 무심코 혐의사실을 시인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한 이전의 동료들이 서로서로를 전범으로 몰아가기도 했다](셸던 해리스, , 눈과마음, 2005, 420쪽)

조사 초기에 731부대 간부들은 서로 입을 맞추었다.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감추고 부인하면서 조사관을 속였다. 특히 문제가 되는 생체실험은 없었다고 손을 내저었다. 1946년 초에 파견된 2차 조사관인 아보 톰슨 중령이 생체실험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지만 돌아온 답은 한결같이 ‘그런 일 없었다’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범죄의 공범 집단 안에서도 균열이 일어났다. 이를테면, (이 글 밑에서 살펴보듯이) 키타노 마사지는 731부대를 번갈아 이끌었던 이시이 시로를 흉보고 깎아내렸다.

▲ 731부대를 이끌었던 이시이 시로(왼쪽)와 키타노 마사지(오른쪽). 산 사람을 마루타로 삼아 생체실험으로 세균무기를 개발해냈던 전쟁범죄자들은 미국과의 ‘더러운 거래’로 살아남았다.

생체실험하며 이름만 ‘군마 방역’인 100부대

먼저, 와카마쓰 100부대장.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수의학과를 나온 수의사 출신이다. 도쿄 전염병연구소에 있다가 수의관으로 군에 들어갔고, 1942년 100부대장을 맡았다. 정식명칭이 ‘관동군 군마방역창’인 100부대는 말이나 동물에 대한 생물전을 연구한다며 1936년에 만들어졌다. 731부대와 마찬가지로 100부대는 관동군 직속으로, 생체실험과 세균전을 펼쳤던 전쟁범죄 집단이다.

100부대는 연구원(대부분이 수의관 장교)과 일반 병사들 합쳐 800명쯤 되었고, 보조 노동력으로 300명쯤의 중국인을 둔 소규모 부대였다(731부대는 군인, 군속 합쳐 3500명 규모). 부대 이름만 ‘군마방역’이고, 실제로는 가축뿐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에 대한 해부 실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적의 군마를 죽일 세균을 개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세균무기를 만들려고 대량의 페스트균, 탄저균, 비저균 등을 배양했다.

731부대와 함께 공동연구를 하기도 했다. 100부대(창춘)는 1855부대(베이징), 1644부대(난징), 8604부대(광둥) 등과 더불어 ‘방역급수부’로 위장한 중국 주둔 일본 세균전 부대들을 아우르는 이른바 ‘이시이 기관’의 하나였다. 100부대장 와카마쓰는 이시이의 영향력 아래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하수인이었다(이시이 기관에 대해선 연재 55 참조).

하바롭스크 재판에서 드러난 100부대 죄상

100부대의 죄상은 1949년 소련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에서 밝혀졌다. 소련군에 항복한 관동군사령관 야마다 오토조(山田乙三, 대장, 강제노동형 25년)에 따르면, 100부대는 세균무기를 만들어 목장이나 가축, 저수지를 감염시키는 방법으로 군사적 파괴활동을 했다. 이를테면, 비저균으로 감염시킨 말들을 부대 근처의 각 마을에 풀어 마비저병을 유행시켰다(진청민, , 청문각, 2010, 9쪽 참조).

100부대가 생체실험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하바롭스크 법정에 섰던 미토모 가즈오 (三友一男, 수의중위, 강제노동형 15년)의 입에서도 나왔다. 미토모는 피실험자 몰래 수면제나 헤로인, 또는 피마자 독을 음식물에다 섞어 먹여 의식을 잃게 만든 뒤 생체 실험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희생자 다수는 중국인들이었고, 러시아인들도 있었다(진청민, 19쪽).

관동군 수의부장 다카하시 다카아쓰(高橋隆驚, 군의중장, 강제노동형 25년)도 100부대가 전쟁범죄를 벌였음을 인정했다. 다카하시에 따르면, 100부대는 농작물 파괴와 가축 살상은 물론 사람을 죽이는 페스트균, 콜레라균, 장티푸스균, 비저균, 탄저균 등 치명적인 세균을 만들고 뿌려 전염병 피해를 입혔다(야마다 사령관과 미토모 중위는 1956년 소련·일본 수교 때 풀려나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다카하시 중장은 1952년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뇌출혈로 죽었다).

“생체실험은 물론 시신 훼손도 안했다”

1945년 8월 재빨리 일본으로 도망쳐온 와카마쓰는 1년쯤 오사카 근처에 숨어 살았다. 1차 조사관 샌더스나 2차 조사관 톰슨도 그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1946년 9월 맥아더사령부의 법무국 조사관들이 숨어있던 와카마쓰를 찾아냈다. 오사카 사무실에서 이뤄졌던 심문은 (이시이 시로에게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쟁범죄 추궁이 아닌, 면담(인터뷰) 수준이었다. ‘오로지 진실만을 증언하겠다’는 서약도 없었다. 와카마쓰의 진술을 들어보자.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인간을 생체실험 도구로 사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비저(말, 당나귀, 노새 등에 앓는 치사율 높은 전염성 질병)에 감염된 사람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해부해본 적도 없다. 일본인 수의사 2명이 비저에 걸려 죽은 적이 있지만 그들을 해부해보는 것도 거절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존중했기 때문에 죽은 뒤 시신을 훼손한 적도 없다](셸던 해리스, 413-414쪽)

3차 조사관 펠은 이시이 시로를 세 번째 ‘심문’한 뒤인 1947년 5월29일, 와카마쓰와 마주했다. 이시이를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펠은 ‘전범 기소와는 전혀 관계없이 세균전 정보를 듣고 싶다’고 안심시키려 애썼다. 와카마쓰도 이미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 731부대 운동회 때 심사위원장을 맡은 키타노 마사지 군의중장 모습. 키타노는 2년 반 동안(1942년 8월~1945년 3월) 731부대에 머물면서 페스트 벼룩 세균무기 개발에 관심을 쏟았다. ⓒ위키미디어

고엽제 관련 제초제 정보도 넘겨

심문 초반에 와카마쓰는 ‘이시이 시로의 731부대와 관계된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이시이의 부대는 의무부대고, 나의 부대는 수의 부대였기에 정보를 공유한 적도 없다’고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와카마쓰도 눈치가 없진 않았다. 전범 면책이 이뤄질 것이란 분위기가 무르익었기에, 그는 부하들과 함께 100부대의 활동을 자세하게 작성해서 제출하겠다고 했다.

펠 조사관은 활동 보고서를 1주일 뒤에 받을 것을 다짐하면서 그를 풀어주었다. 와카마쓰는 약속을 지켰다. 그와 연락을 주고받은 100부대의 연구원 10명도 그들의 연구결과를 보고서로 내놓았다. 한 연구원은 곡물에 세균을 옮겼을 경우 생겨날 곡물 질병에 관한 19쪽의 영문 보고서를 내놓아 미 조사관들을 기쁘게 했다.

와카마쓰의 한 부하는 화학 및 식물성 제초제에 관한 연구보고서도 내놓았다. 여기엔 훗날 베트남에서 널리 쓰여져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에이전트 오렌지’ 같은 고엽제(defoliant) 관련 정보가 담겨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와카마쓰는 일본의 큰 제약회사인 니혼이야쿠(日本医薬)공장장으로 노후를 편히 지냈다(731관련자들의 전후 행태는 따로 다룰 예정임).

세균무기 개발하려 생체실험 되풀이

이시이 시로에 이어 731부대장에 올랐던 키타노 마사지(北野政次, 1894-1986)도 특급 전쟁범죄자다. 키타노는 만주 선양(瀋陽, 옛이름은 봉천) 의과대학 세균학 교수로 2년 반 동안 있다가 1942년 8월 731부대 제2대 부대장이 됐다. 만주 의과대학에서 기타노가 순수하게 세균학 강의만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만주에 있던 일본 군의관들과 의학자들은 항일 포로나 스파이를 ‘인간 모르모트’로 삼아 인체 실험을 하거나 생체해부를 해도 된다는 인식을 가졌다고 알려진다(15년전쟁과 일본의 의학의료연구회, ,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20, 209쪽 참조).

2년 반 동안( 1942년 8월~1945년 3월) 731부대장으로 있으면서 키타노 마사지는 전임자 이시이 시로가 했던 세균무기 개발을 꾸준히 해나갔다. 그런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731부대 병사였던 우에다 야타로(上田彌太郞)는 패전 뒤 중국 푸순 감옥에 갇혔다. 1954년 그가 남긴 공술서에 따르면, 키타노가 731부대장으로 있던 1943년 5월 어느 날 생체실험이 벌어졌다.

[나는 731부대 제4부 제3반에서 생체실험의 관찰조수로 있었다. 관찰 2일 째에 2명이 죽었다. 다음날 아침 체온 측정하러 (수감자 감옥에) 가보니 1명이 죽어 있었다. 죽은 이는 해부된 뒤에 보일러실에서 태워졌다. 그 시체의 특징은 50세 정도로 손가락이 매우 길고 노동을 별로 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같은 날 오후에 1명이 죽고 다음날 또 1명이 죽었다. 그 실험의 목적은 연구실에서 시험한 세균을 실제로 인체에 넣어 효력을 확인하고, 보다 강력한 독성을 갖는 세균을 연구 개발하는 자료를 얻기 위해서였다](한민족문화교류협의회, 2009, 205쪽).

위 공술서를 보면, 키타노 731부대장은 전임자였던 이시이와 마찬가지로 ‘악마의 의사집단’의 수괴였음이 드러난다. 키타노와 이시이 둘 다 ‘마루타’들을 생체실험용으로 희생시켜 가면서 보다 독성이 강하고 살상력이 높은 세균무기 개발에 미쳐있었다. 키타노는 일본에서 최신 장비를 들여와 작업의 효율을 높이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키타노는 2년 반 동안 731부대에 머물면서 특히 페스트균을 가진 벼룩을 세균무기로 사용하는 방법에 관심을 쏟았다. 이 연구는 1945년 초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이시이 시로가 1945년 3월 부대장으로 복귀하면서 더욱 활기를 띠게 됐다.

“인간이 아니라 원숭이 실험했을 뿐”

이시이가 731부대장으로 복귀하자, 키타노는 지나파견군 제13군의부장(중장)으로 옮겨갔다. 1945년 가을 맥아더사령부 정보담당(G-2)인 참모2부의 찰스 윌로비 준장은 이시이만큼이나 세균전 정보를 지니고 있을 키타노의 행방이 궁금했다. 추적 끝에 그가 상하이 일본군 포로수용소에 붙잡혀 있는 것을 알았다. 윌로비는 키타노의 세균정보가 타국, 특히 소련에 넘어가선 안 된다고 여겼다.

1946년 1월9일 키타노는 미 군용 특별기를 타고 일본 아츠기 공항에 내렸다. 그 길로 감옥에 갈 것으로 키타노는 짐작했지만, 정작 그가 머물게 된 곳은 도쿄의 한 호텔 방이었다. 이시이가 도쿄 신주쿠의 자택에 연금된 상태와 비슷했다. 분위기도 심문이 아니라 면담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참모2부의 화이트사이드 대령이 키타노와 얼굴을 마주했다. 키타노는 100부대장 와카마쓰처럼 그럴듯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메릴랜드주 데트릭 기지의 문서보관서에 있는 심문속기록에 따르면, 키타노는 ‘나는 모르쇠’로 버텼다. 세균전의 공격과 방어에 관하여 731부대에서 어떤 연구를 했는가, 상세한 데이터를 내놓으라고 했지만, 그는 애매한 말로 얼버무렸다. 중국인 죄수들을 생체실험에 쓴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인간을 실험에 쓴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우겼다. “원숭이나 쥐, 다람쥐 같은 돌물들을 방역 차원에서 실험했을 뿐, 인간을 생체실험하지 않았다.”

심문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헛되이 시간만 보냈다. 머릿속으로 F자가 들어간 쌍욕을 참았을 화이트사이드 대령은 (1차 조사관 샌더스 중령에 이어 2차 조사관으로 파견된) 톰슨 중령에게 키타노 심문을 넘겼다. 1946년 2월6일 톰슨 중령이 키타노를 만났지만 싱겁게 끝났다. 톰슨이 그에게 ‘중국인 포로를 생체실험용으로 쓴 적이 있느냐고 묻자, ‘인간을 실험 재료로 쓴 적 없다’는 등 거짓 답변이 돌아왔다.

이시이와 키타노, 서로를 라이벌로 의식

키타노와 이시이 둘은 성격이 달랐다. 이시이 시로는 드러내놓고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편이었고, 유흥비를 대느라 공금에 손을 대 문제가 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키타노는 그런 이시이를 경멸했다. 잔인함에서는 서로 닮았다. 나이는 이시이가 2년 많았지만 의학박사 학위는 키타노가 먼저 받았다. 둘은 라이벌 의식을 지녔고 사이도 좋진 않았다(키타노는 도쿄 제국대학, 이시이는 교토 제국대학 출신).

1942년 일본의학회 총회 때 찍은 오래된 흑백사진을 보면 둘은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다. 둘의 관계가 불편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둘 다 군도(軍刀)를 허벅지 사이에 끼고 앉은 것이 인상적이다(1959년 이시이 시로가 후두암으로 죽었을 때 키타노가 장례위원장을 맡긴 했다. 731부대장이란 경력 때문에 이름뿐인 위원장을 맡았을 것이다).

이시이를 라이벌로 여겼기 때문일까, 그에게 불리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일본인이 생물무기(BW) 연구를 한 곳은 731부대 한곳 뿐’이라 주장하면서, 이시이가 도쿄 지도자들의 승인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BW 연구를 했다고 비난했다. 만약 ‘폐하'(히로히토 일왕)가 알았다면 분명히 연구를 중단시켰을 것이라는 주장마저 폈다. 톰슨 조사관은 끝내 키타노로부터 세균전 정보를 얻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톰슨도 화이트사이드 대령처럼 ‘저 인간은 뻔뻔한 거짓말쟁이’라고 F자 쌍욕을 속으로 삼켰을 것이다.

세균전 정보를 캐내려는 미국은 키타노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1947년 4월7일 도쿄 사령부로 불려온 키타노는 ‘알고 있는 세균전 정보를 종이에 적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분위기로 봐서 자칫 구속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낀 키타노는 그곳 사령부 규격용지로 11장에 이르는 긴 진술서를 써내려 갔다.

그는 자신에게는 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731부대의 구조와 5개 지부의 활동 상황을 털어놓았다. 이시이가 했던 생물무기(BW) 개발에 대해서도 조심스레 용어를 골라가며 썼다. 이시이의 연구업적을 깎아내리며, 과학적 가치가 별로 없는 것들이라 했다. 반면에 그 자신은 티푸스와 페스트를 비롯한 다양한 전염병을 막는 백신을 개발했고, 성병을 치료하는 혈청을 만들었다고 자랑했다. 그렇다고 일본군 성노예로 죽을 고생을 했던 ‘위안부’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진술서를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키타노는 3차 조사관으로 파견된 펠 조사관의 ‘부드러운 심문’을 받았다. 그 무렵 이시이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자신을 전쟁범죄자로 기소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키타노는 미국이 그토록 바라는 세균정보들을 펠 조사관에 내놓았다. 페스트, 탄저병, 출혈열,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이질 등을 일으키는 세균 실험결과를 알려주었다. 콜레라, 파상열, 살모렐라와 각종 식물병에 대한 정보도 건네주었다. 그것들이 731부대에서 마루타를 희생시켜가며 얻어낸 ‘피 묻은’ 자료였음은 말할 나위 없다.

▲ 전범 면책을 대가로 731부대 연구원들이 미국에 제공한 410쪽 분량의 인체실험 부검보고서 영문 표지. ‘A’는 탄저균을 나타낸다. 미 역사학자 셸던 해리스가 미 유타주 더그웨이 도서관에서 찾아냈다. ⓒ더그웨이 도서관

“면책 문서 없지만, 전범 처벌도 없다”

1947년 9월8일 미국 정부는 국무부를 통해 도쿄의 맥아더사령부에 극비 전문을 보냈다.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 간부들의 처리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 요점은 ‘그들을 전범자로 처리하지 않기로 했으니, 가능한 한 많은 세균전 자료를 수집하라’는 것이었다. 전문 내용은 이러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이시이 시로와 기타 관련자들에게 면책(免責) 약속을 하지 말고 최대한 많은 (세균전) 정보를 수집한다. △이시이 등에 대해 전쟁범죄 관련 (사면)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미 당국은 미국의 안전보장을 위해 이시이 및 그 일당들의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지 않을 것이다](궈청줘우·랴오잉창, , 베이징 연산출판사, 1997, 451쪽. 진청민 , 청문각, 2010, 910쪽에서 재인용).

맥아더 사령부에 보낸 전문에서 미국 정부가 이시이 일당에게 전쟁범죄를 덮어준다는 약속을 문서로 분명히 못 박지 않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에 하나 ‘면책 문서’가 언론에 보도되거나 특히 소련에 알려질 경우, 미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논란이 되기 마련이다. 자칫 이를 둘러싼 청문회까지 열려 책임을 따져 물을 수도 있다.

그런 후폭풍을 피하려면? 문서라는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게 낫다. 이시이 일당의 전쟁범죄를 덮는 것은 물론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미 정부나 군부 입장에선 문서 파동보단 낫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 판단 아래 미국은 세균전 정보를 ‘내부 정보’로 처리하고 ‘전쟁범죄의 증거’로는 삼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4차 조사관 힐, 편하게 정보 챙겼다

미국 정부가 전범 면책 원칙을 세운 뒤인 1947년 10월28일, 에드윈 힐(데트릭 세균연구소 기초과학부 주임)이 4차이자 마지막 조사관으로 파견됐다. 그는 데트릭 기지의 병리학자 조셉 빅터 박사와 함께 일본에 갔다. 힐 조사관에게 주어진 임무는 앞의 펠 조사관이 들고온 세균정보 가운데 정리가 잘 안 된 자료들과 궁금한 사항들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특히 만주에서 가져온 인체 해부 표본과 해부 기록들을 확보하려 했다. 1개월 넘게 이어졌던 조사 기간 중 힐과 그의 파트너 빅터는 20명가량의 일본 세균전 관련자들을 만났다.

힐 조사관은 앞서 다녀간 3명의 조사관들에 견주어 훨씬 일이 편했다. 전임자들처럼 ‘전쟁범죄를 추궁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조차 꺼낼 필요가 없었다. 미국에 협력한다면 전쟁범죄자로 넘기지 않을 것이 확실해진 시점에서 731부대 간부들은 저마다 감춰놓았던 ‘피 묻은’ 실험 자료들을 내놓았다. 힐이 1947년 12월 12일에 쓴 보고서를 보자.

[조금은 순진한 어조로 조사를 받은 과학자들이 자발적으로 정보를 털어놓았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면담을 진행하는 동안 전범재판에 기소되는 걸 막아주겠다는 말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더그웨이 도서관 소장 문서번호 008, 해리슨 462쪽).

“말의 피를 뽑아 인간에 주사했다”

그 과정에서 이시이 시로가 일본 육군참모총장의 훈령을 어기며 폐기하지 않고 챙겨온 8000여 장의 세균전 실험 관련 슬라이드, 3권의 인체 해부 보고서(페스트, 탄저, 비저 생체실험 관련)를 확보했다. 기꺼이 세균전 자료를 내놓은 자 가운데엔 이시이 시로에 이어 731부대장을 지냈던 키타노 마사지도 있었다. 그는 생체실험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가 내놓은 송고열병에 관한 문서엔 이런 끔찍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다음 환자는 질병에 감염되어 죽어가는 환자의 간이나 비장 또는 콩팥에서 뽑은 피나 직접 혈관에서 뽑은 피로 감염시켜서 얻었다. 환자들을 오래 견디게 하기 위해 모르핀을 사용했다. 열병에 갈린 사람의 피를 말에게 넣었다. 잠복기간이 끝나자 5~7일 사이에 15마리 가운데 6마리가 열병 증상을 나타냈다. 열병에 걸린 말의 피를 뽑아 다른 말에 주사했고,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주입했다. 실험대상자들은 100% 사망률을 나타냈다] (더그웨이 도서관 소장 문서번호 017, 해리스 463쪽).

이시이 시로도 그동안 입을 맞춰온 부하들과 함께 ‘마루타’를 생체실험으로 희생시키면서 만든 ‘피 묻은’ 세균전 자료들을 담은 네 편의 보고서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731부대 연구원 18명이 쓴 ‘세균무기로 생체실험을 한 보고서'(60쪽 분량) △농작물을 파괴한 세균전 연구(20쪽 분량) △가축에 관한 세균전 연구(연구원 10명 참여) △이시이가 직접 쓴 ’20년 동안의 전반적인 세균전 연구에 대한 결론’ 등이다. 여기에다 8000장 분량의 세균무기 생체실험, 생체해부의 병리학 표본과 슬라이드가 덧붙여졌다.

“약간의 압박만으로 숨겨둔 자료 받아냈다”

일부 악마의 의사들은 자료를 내놓으면서도 일부는 숨겨두려다 조사관의 예리한 눈에 들키기도 했다. 전 731부대 연구원이었던 이시카와 다치오(石川太刀雄)가 그랬다. 그가 일하는 가나자와대학의 연구실에서 생체실험 자료를 건네받으려 했던 힐 조사관의 보고서를 보자.

[이시카와가 갖고 있는 표본이 전혀 정리돼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약 500증례에서 채취한 인체 표본 목록을 만들었는데, 조사할만한 표본은 400증례뿐이었고, 다른 수많은 자료가 어딘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하지만 처음 제출된 것(400증례)과 함께 약간의 압박만으로도 나머지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15년전쟁과 일본의 의학의료연구회, 87쪽).

위 문장에서 ‘약간의 압박’이란 표현은 그 무렵 조사관들과 731부대 전범들 사이의 신경전을 떠올린다. 여기서 ‘500증례’라면 살아있던 ‘마루타’ 500명을 생체실험으로 죽였다는 끔찍한 얘기가 된다. 힐 조사관은 일본에서 거둔 조사 성과에 뿌듯한 마음을 지닌 채 자신의 보고서를 이렇게 마무리했다(연재 58에 썼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줄여서 옮긴다).

[인체실험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우리 연구실에서는 이런 (세균)정보를 알아낼 수 없다. 이 자료를 얻기 위해 들인 총액은 25만 엔이다. 이 연구의 가치에 견주면 아주 작은 액수일 뿐이다] (靑木富貴子, , 新潮社, 2008, 438쪽).

힐 조사관은 자신에게 세균자료를 건네준 731부대 전범자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보고서 끝에 ‘이 정보를 자발적으로 제공한 개개인이 그 일로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했다. ‘전범 추궁을 더 이상 하지 말아달라’는 뜻이다. 힐은 또한 ‘이 정보가 타인의 손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모든 노력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그가 말하는 ‘타인’은 곧 소련을 가리킨다.

이렇듯 미국은 20세기 최악의 전쟁범죄자들과 ‘더러운 거래’를 했다. 도쿄전범재판에서 이들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검찰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도쿄재판의 수석검사 조지프 키넌은 맥아더사령부의 정보(G-2) 책임자였던 찰스 윌로비 준장(참모2부장)과 손을 잡고 정의감 넘쳤던 그 검찰관(육군 대령)을 미국으로 쫓아냈다. 도쿄전범재판 법정에서 731부대의 전쟁범죄가 입에 오르내리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다음 주에 이 문제를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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