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 둘레길 성폭행 살인 사건’ 피해자 공모씨의 친오빠 공재현(37)씨는 27일 오후 6시쯤 법률대리인과의 통화를 마치고 만감이 교차했다. 기다렸던 소식이지만 마냥 기쁠 수만은 없었다. 인사혁신처가 이날 동생의 공무상 재해(순직)를 인정했다는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공씨는 지난해 8월 방학 중 교직원 연수 기획 업무를 준비하기 위해 등산로를 통해 학교로 가던 중 가해자 최윤종(31)을 마주쳐 참변을 당했다.
재현씨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재작년 아버지 임종 당시에도 간호를 한달간 도맡을 정도로 좋은 딸이자 동생, 그리고 선생님이었다”며 “순직 공무원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기록될 수 있어 동생의 억울함이 조금이나마 풀릴 것 같아 위안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순직 인정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도움을 주신 동료 교사, 학부모, 동네 주민 등 많은 분들께 감사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지난해 8월 신림동 둘레길 성폭행 살인 사건으로 사망한 피해자 공모씨의 제자가 남긴 편지. 편지에는
지난해 8월 신림동 둘레길 성폭행 살인 사건으로 사망한 피해자 공모씨의 제자가 남긴 편지. 편지에는 “선생님이 돌아가셔서 슬퍼요. 아프지 마세요. 선생님이 가르쳐주신대로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겠습니다. (…) 선생님 사랑해요”라고 적혀 있다. 유족 제공
지난해 10월 신청한 공씨의 순직 인정은 당초 험난한 길이 예고됐다. 우선 교육공무원의 순직 인정률이 낮은 편이다.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2019~2023년 상반기 교육공무원의 순직 인정률은 26.3%에 불과하다. 전체 공무원의 순직 인정률(56%)의 절반도 미치지 못한다.
공씨가 사고를 당한 등산로(둘레길)가 ‘통상적 출근길’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도 불투명했다. 공무원 재해보상법에 따르면 ‘통상적 경로와 방법으로 출퇴근하던 중 발생한 사고’로 다쳐 사망한 경우는 공무상 재해에 해당한다. 2019년과 2020년 인사혁신처가 발간한 ‘공무상 재해 심사 사례집’에 따르면, 인사혁신처는 등산로에서 출·퇴근하다 다친 사례 2건에 대해 “근무지와 주거지 위치를 고려할 때 통상적 경로와 방법에 의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불승인 판단을 내렸다. 이 때문에 전문가 사이에선 “등산로를 통상적 출근길로 입증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았다.
숱한 난관을 뚫고 공씨가 순직을 인정받을 수 있던 배경에는 동료 교직원, 학부모, 지역 주민 등의 증언이 있었다. 유족 측이 순직 심사에 제출한 사실 확인서만 총 272건이었다. 고인이 생전 몸담았던 지역 축구팀, 제자, 지역 경찰까지 힘을 보탰다. 1만6915명이 서명한 탄원서도 제출됐다. 유족 측 법률대리인 정해성 변호사는 “폐쇄회로(CC)TV가 드문 둘레길에서 난 사건이고, 도보로 이동했기 때문에 내비게이션 등 고인의 평소 이동 경로를 직접 보여줄 수 있는 데이터가 없어 입증에 어려움이 있었다”며 “고인이 평소 해당 등산로에서 출퇴근하는 모습을 목격한 내용 등 유의미하고 헌신적인 여러 증언이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이를 토대로 유족 측은 ▶판례에 따르면 통상적 경로는 반드시 최단 코스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 ▶고인이 자동차를 보유하지 않아 평소에도 둘레길을 도보로 이동해 출근했다는 점 ▶고인의 소속 학교 다른 교사와 주민들도 해당 둘레길로 출퇴근하는 점 ▶혹서기였기 때문에 도보 이동 시 나무 그늘이 있는 둘레길을 선택하는 게 합리적이었다는 점 등을 주장해 순직 인정을 이끌어냈다. 정해성 변호사는 “솔선수범해 출근한 고인의 사례에 대해 국가가 소극적 입장을 취했다면, 교사들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공무 활동이 매우 위축됐을 것”이라며 “교육계 전체의 사기 진작에도 다행인 결과”라고 평가했다.
같은 날 인사혁신처는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 사망 교사 A씨의 순직 신청도 인정됐다고 유족에게 통보했다. 서이초 1학년 담임이었던 고인은 지난해 7월 학교 내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여 사회에 충격을 줬다. A씨는 평소 학부모 민원과 문제 학생 지도에 고충을 겪은 것으로 파악됐지만, 경찰 조사 결과 ‘학부모 갑질’ 등 구체적 혐의는 발견되지 않았다.
지난해 ‘교권 침해’ 논란을 촉발한 서울 서이초등학교 교사 사망과 관련해 인사혁신처의 마지막 절차인 공무원재해보상심의회가 21일 오후 세종시에서 열린 가운데 한 교사가 심의회가 열리는 동안 입구에서 순직 인정을 촉구하는 메모판을 들고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교권 침해’ 논란을 촉발한 서울 서이초등학교 교사 사망과 관련해 인사혁신처의 마지막 절차인 공무원재해보상심의회가 21일 오후 세종시에서 열린 가운데 한 교사가 심의회가 열리는 동안 입구에서 순직 인정을 촉구하는 메모판을 들고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이에 유족 측은 A씨가 학생 지도의 어려움을 입증할 1분 내외 영상 7~8개를 이달 초 공무원재해보상심의회에 제출한 것으로 파악됐다. 영상에는 아이들이 수업 중 의자를 뒤집고 발로 차거나, 울면서 물건을 집어 던지는 등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또 같은 학교 동료 교사가 학부모와 주고받은 메시지가 300건 미만인데, A씨는 2023년 1학기 동안 약 2000건의 메시지를 주고받은 사실도 증거로 제출했다.
유족 측 법률대리인인 문유진 변호사는 “어느 한 자료가 결정적이었다기 보다는 직무상 스트레스가 되는 여러 요인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순직을 인정한 것 같다”며 “이번 순직 인정은 서이초 선생님의 사망이 개인 차원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책임이 있다는 결정이고, 교권 보호의 변곡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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