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까지 물 차도 못떠나요"…전세피해 억울한데 건물 문제까지

누수·단전·단수…임대인 잠적에 수리비 떠안는 전세 피해자들

특별법 개정안에 ‘건물관리 지원책’ 담겼지만…보완은 감감무소식

공은 다시 국토위로…총선 국면서 법안 심사 난항

전세가시 피해주택에 들어찬 물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인천 계양에 사는 전세사기 피해자 허민우(24) 씨는 발목까지 차오른 물을 헤치며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간다.

다세대 건물 배관에 문제가 생겨 반지하인 허씨 집에 물이 들어차는데, 집주인은 연락을 끊은 지 오래다.

‘보증금 반환이 어렵고 사실상 파산 상태’라는 집주인의 메시지가 온 건 지난해 2월. 허씨가 17살 때부터 전국 기능대회에 나가 탄 상금과 아르바이트로 번 돈 8천만원으로 전셋집을 얻은 지 5개월 만이었다.

입주 직후부터 조금씩 나타나던 누수는 시간이 지나며 침수 수준이 됐다. 결국 사비를 들여 물을 퍼내는 펌프를 설치했지만 악취와 곰팡이가 허씨를 괴롭힌다.

그는 “날이 따뜻해지면서 얼었던 물까지 흘러 들어와 물 차는 속도가 빨라졌다”며 “여름 장마철이 오면 잠자다 익사하는 건 아닌지 두렵다”고 말했다.

전세사기 피해자로 일찌감치 인정받았지만 “그건 종이 한 장일 뿐”이라는 게 허씨의 말이다. 경매가 개시돼 쫓겨날 위험에 처한 세입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긴급 주거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허씨는 “저는 선순위 임차인이기 때문에 쫓겨나지 않을 집이라도 있지 않느냐는 말도 듣는다”며 “각기 다른 이유로 방치되고 있는 전세사기 피해자를 위해선 특별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전세사피 특별법 시행 9개월…보완은 감감무소식

여야는 지난해 5월 전세사기 피해지원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시행 6개월마다 보완하기로 합의했다.

특별법 운용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해서다.

이달 말이면 특별법이 시행된 지 9개월째지만 ‘보완’은 감감무소식이다.

그러는 동안 주택 관리가 시급한 문제로 떠올랐다.

전세사기 주택은 집주인이건, 관리업체건, 지방자치단체건 관리에 손을 놓고 있어 허씨 사례처럼 심각한 누수가 생겨도 도움을 받지 못한다.

인천 전세사기 피해자 손호범 씨는 “건물 외벽이 뜯겨나가 차량이 파손되고, 보일러 배관이 휘어도 구청은 시청에, 시청은 구청에 떠넘겨 의지할 곳이 없다”며 “세입자들은 관리비를 제대로 납부하고 있는데도, 관리업체가 몇 개월째 전기세를 미납해 한전에서 독촉장이 날아오는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전세사기 피해에 이어 2차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경·공매에서 전세금을 조금이라도 건지기 위해 집을 떠날 수 없고, 떠날 돈도 없다고 호소한다.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인 전세사기 피해지원 특별법 개정안에는 전세사기 피해주택 관리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지자체장이 실태 조사를 거쳐 최장 2년간 위탁 관리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신탁 전세사기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책을 담았고, 전세사기 피해자 요건 중 임차 보증금 한도를 7억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피해자로 인정될 수 있는 임차인에 외국인도 포함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사각지대 보완책과 함께 담긴 ‘선(先)구제 후(後)회수’ 방식의 피해자 지원책에 정부·여당이 반대하면서 특별법 논의와 보완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선구제 후회수’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등 공공기관이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임차인으로부터 보증금 반환 채권을 매입해 임차인을 우선 구제하고 추후 책임 있는 자에게 구상권을 청구해 비용을 보전하는 방안이다.

선구제 기준은 현행 주택임대차보호법에 명시된 최우선변제금 기준인 30%로 잡았다.

세상 등진 전세사기 피해자 1주기 추모제

◇ 4월 총선 앞둔 여야, 특별법 논의 나설지 미지수

4월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적극적으로 법안 심사에 나설지는 미지수다.

전세사기 피해지원 특별법 개정안은 지난해 12월 27일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이 국토교통위원회에서 단독으로 의결해 법사위에 넘겨졌다. 국민의힘은 특정 사기 행위에 당한 피해자에게만 국가 예산을 지원하는 것은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고 반발하며 회의에 불참했다.

국회법에 따르면 법사위가 특정 법안 심사를 60일 안에 마치지 않으면 소관 상임위원회가 본회의에 부의할 수 있다. 상임위원장과 여야 간사 간 협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재적위원 5분의 3 이상이 찬성하면 된다.

법사위 회부 60일이 되는 날은 2월 25일이기에, 이날부로 공은 다시 국토위로 넘어왔다.

특별법 개정안의 본회의 직회부에 필요한 국토위 재적위원 5분의 3을 채우려면 민주당 17명과 녹색정의당 1명 등 야당 국토위원 전원이 출석해 찬성표를 던져야 한다.

그러나 총선 국면에서 여야 협의는 물론 야당 국토위원 전원 참석마저 불투명한 상황이다.

국토위에서 직회부 요구가 이뤄진다 해도 숙의 기간이 필요하다. 직회부 요구 30일 이내에 법안 부의와 관련한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부의 여부를 본회의에서 무기명 투표로 결정할 수 있다.

피해자들로서는 21대 국회가 임기 만료일인 5월 29일 전까지 책임을 다하길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21대 국회에서 특별법 개정안이 폐기되면 법안 재발의와 논의까지 다시 오랜 기간을 기다려야 한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지난 24일 서울 보신각에서 인천 미추홀구 피해자 1주기 추모 문화제를 열어 특별법 개정을 요구했다.

안상미 전세사기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전세사기는 선거용으로,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되는 사안이며 국가가 마땅히 지켜내야 할 국민의 주거 기본권과 재산권 보호와 관련된 사안”이라며 “피해자를 보호하는 특별법 개정을 속히 진행해달라”고 촉구했다.

서울 신탁 전세사기 피해자 박현수 씨는 “짧게는 몇 년, 최대 15년 감방에 다녀오면 연봉 몇억원에서 몇십억원이 생기는 것 아니냐”며 “솜방망이 처벌로 지속적인 전세사기가 나오고 있기에 강력한 처벌을 위한 법 개정이 필요하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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