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 새장’에 갇힌 윤 대통령 [에디터의 창]

‘김건희 새장’에 갇힌 윤 대통령 [에디터의 창]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3일 충남 서천군 서천읍 서천특화시장 화재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서천|성동훈 기자

과거 정부들을 돌아보면 대통령의 존재는 임기말 옹색해졌다. 발언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행보에 대한 주목도는 떨어진다. 신문 1면을 장식했던 대통령 관련 뉴스는 정치면 구석에 찌그러지거나, 아예 실리지 않게 된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듯 임기 후반 대통령의 힘이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임기말을 감안해도, 대통령의 존재감이 급격하게 비정상적으로 사그라드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약화된 국정동력, 내부 권력투쟁, 스캔들의 덫에 걸린 전직 대통령들은 쓸쓸하게 물러났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의 처지는 말년이 초라했던 이전 대통령들보다 훨씬 심각하다. 집권 2년도 안 돼 임기말에나 벌어질 법한 사건들이 주변에서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윤 대통령은 자신의 위기상황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임기말 증후군에 시달리는 대통령’에 대한 글을 준비하던 차에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사퇴 파동이 터졌다. 지지율 하락, 인사 실패, 가족 스캔들 등에 시달리던 윤 대통령이 내부 권력투쟁에 휘말린 것이다. 레임덕의 마지막 퍼즐이 채워졌다.

한 위원장이 김건희 여사의 명품가방 수수 의혹에 대해 “국민들께서 걱정하실 만한 부분이 있다”고 하고, 김 여사를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유한 김경율 비대위원의 마포을 공천 뜻을 밝힌 것에 윤 대통령은 분노했다고 한다. 어지러운 여당을 수습하라고 보낸 비대위원장이 아내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한 달 만에 쳐내려 했다니, 이런 막장드라마가 없다. 이준석, 김기현에 이어 한동훈까지. 여당 대표는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찍어낼 수 있는 자리인가. 윤 대통령을 보면서 화를 제어하지 못하는 전제군주를 떠올린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한 위원장에 대한 사퇴 요구 철회로 파문은 봉합됐지만, 이번 일은 윤 대통령의 정세 판단과 리더십에 근본적 회의를 남겼다. 김 여사가 명품백을 받았다는 증거가 존재하고, 여론도 부정적인 만큼 못 이기는 척 지켜보는 게 정상이다. 과거 대통령들도 가족 비리가 불거졌을 때 여론을 따랐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김 여사 해명과 사과, 특검 도입을 요구하는 여론은 외면한 채 김 여사 보호가 최우선 가치임을 자인했다. 공정과 상식을 실천한다며 남의 가족은 탈탈 털더니, 자신의 아내 문제엔 왜 이리 관대한가.

일각에선 한 위원장에게 덧씌워진 ‘윤석열 아바타’ 이미지를 털기 위한 약속대련이라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윤 대통령이 입은 상처가 너무 크다. 사퇴 요구를 거둬들이면서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은 훼손됐다. 차기 주자가 대통령과의 권력투쟁에서 판정승하는 장면을 여당 의원들은 물론 정부 관료들도 민감하게 주시했을 것이다. 그동안 윤 대통령을 애써 감쌌던 보수언론들도 한 위원장 편에 섰다. 무엇보다 김 여사에 대한 여론은 더 나빠졌다. 김건희 특검 도입에 대한 찬성 여론은 더 압도적이 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윤 대통령에게 위기 아닌 때가 없었다. 독선적 국정운영, 인사 실패, 이념 공세, 잦은 해외 순방, 술자리 논란 등으로 윤 대통령 주변은 늘 시끄러웠다. 김 여사는 ‘조용한 내조’ 약속을 깨고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관저 공사를 아는 사람에게 맡겼다는 의혹, 지인을 전용기에 태운 사실, 순방 중 명품숍 방문, 인사개입 의혹 등. 대통령 부부가 국정 리스크가 되면서 지지율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을 맴돌았다. 낮은 지지율이 일상화된 윤석열 정부는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막장드라마든, 약속대련이든 이번 일을 겪으면서 윤 대통령의 상황은 훨씬 악화됐다. 여당이 선거에서 패하면 남은 3년 임기 동안 식물 대통령이 될 수 있다. 설사 여당이 선거에서 이기더라도 레임덕은 피하기 어렵다. 대통령 리스크를 딛고 선거를 이끈 한 위원장에게 여권의 힘이 쏠릴 것이다. 김 여사 특검에 대한 압도적 찬성 여론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윤 대통령은 기자회견 대신 KBS 인터뷰를 통해 김 여사 문제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해명마저도 편한 방식으로, 편한 말만 하겠다는 뜻인가. 어설픈 해명은 변명으로 비칠 뿐이다. 김 여사 문제를 털어내지 못하는 한 윤 대통령은 국민 앞에 떳떳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 가을에 낙엽이 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여름부터 낙엽이 지는 것은 비정상이다. 이상기온 탓이거나, 뿌리가 병들었거나. 지금 윤 대통령 부부 상황이 딱 그렇다.

이용욱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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