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J. 심슨이 1995년 6월 재판에서 검찰이 증거로 제출한 장갑을 끼어 보고 있다. AP 연합뉴스
1990년대 중반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것은 물론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끈 살인 사건의 ‘주인공’ O.J. 심슨이 사망했다.
심슨의 유족은 그가 암 투병 중 76살을 일기로 사망했다고 11일 밝혔다. 심슨의 변호인은 그가 숨지기 전 자신이 진범이라는 의혹을 받아온 사건에 대해 반성하는 입장을 내놓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O.J. 심슨 사건’은 최고의 스포츠 스타가 전처를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되고, 경찰의 증거 조작 시비와 인종주의 논란이 엮이고, 텔레비전으로 재판이 생중계되면서 하나의 신드롬으로 발전한 사건이다. 사건 선고 장면 시청자가 1억명이 넘을 정도였다.
사건은 1994년 6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심슨의 전처 니콜 브라운 심슨과 그 남자 친구가 흉기에 피살된 채 발견되면서 막이 열렸다. 1992년에 니콜과 이혼한 심슨이 의심을 받았다. 그는 출석 요구를 거부하고 차량을 타고 도주하다 체포됐다. 경찰의 추격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면서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커졌다.
O.J. 심슨과 전처 니콜 브라운 심슨. AP 연합뉴스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는 심슨의 디엔에이(DNA), 심슨의 집과 차량에서는 피해자들의 혈액 등을 발견했다며 증거를 제출했다. 1970년대 최고의 미식축구 스타였고 할리우드 배우로도 활동한 심슨은 전처를 비롯해 2명을 살해한 범인으로 꼼짝없이 몰리는 듯했다. 하지만 심슨이 고액을 주고 고용한 변호사들의 활약이 상황을 반전시켰다. 이들은 최초 출동 때 당연히 발견돼야 했을 위치에 있었던 증거가 나중에 발견되고, 경찰이 증거를 오염시켰을 수 있고, 심지어 인종주의 성향이 강한 담당 형사가 증거를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변론 전술을 폈다.
피고인이 흑인이라 인종주의 논란은 사회적으로도 큰 주목을 끌었다. 로스앤젤레스는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1992년 무죄를 선고받자 흑인들이 대규모 유혈 폭동을 일으킨 지역이어서 인종주의 논란에 더 민감했다. 이런 시비로 배심원단이 여러 차례 교체됐다. 열릴 때마다 미국 전역에서 수많은 시청자들의 눈길을 잡아끈 재판의 하이라이트는 심슨이 법정에서 범행 때 썼다고 지목된 가죽장갑을 끼어 보는 장면이었다. 이는 검찰이 요구한 것이었지만 장갑은 심슨의 손에 잘 맞지 않았다. 검찰이 스스로 초래한 패착이었다. ‘여론 재판’은 검찰에 불리하게 돌아갔고, 결국 배심원단은 무죄 평결을 내놨다.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되면 검찰은 항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죄는 그대로 확정됐다.
하지만 이 사건은 또 다른 반전을 만났다. 피해자들 유족이 심슨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심슨이 범인이라는 판단에 따라 3350만달러(약 458억원)를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대중은 ‘형사재판 무죄, 민사재판 유죄’라는 당혹스런 결과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형사와 민사 재판이 요구하는 입증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벌어진 일로 법논리적으로는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상식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였다.
이후 심슨은 파산 신청을 하고 배상금 추심이 어려운 플로리다주로 이사하기도 했다. 피해자들 유족은 배상금 일부만 받아낼 수 있었다. 심슨은 2006년에는 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실제 범인이라고 가정한 상황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심슨은 이 책에서 실제 사건 상황과 비슷한 묘사를 곁들이면서 니콜의 집에 흉기를 들고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떠보니 피에 물든 주검 두 구가 보였다고 했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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