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한 가지만 먹다 보면 질립니다. 위스키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거나 맛이 한쪽으로 치우친 위스키는 한두 잔만 마셔도 입안이 금세 피곤해집니다. 이럴 때 보통 위스키의 밸런스가 좋지 않다는 표현을 씁니다. 밸런스는 위스키를 구매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한 병을 다 비우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5년차 오너 바텐더 마스터께 물었습니다. 몰트 바 ‘팩토리 정(亭)’의 박시영 마스터는 25년째 칵테일을 제조하고 있습니다. 그의 손을 거친 칵테일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연륜과 깊이가 묻어납니다. 그 맛의 중심에는 ‘절대 밸런스’라는 요소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스터의 칵테일은 타란티노 감독 특유의 치열하고 자극적인 맛이 아닌, 잔잔한 일본 영화처럼 서서히 스며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초반에는 슴슴한듯 하지만 중후반부에 임팩트 있는 맛이 훅 치고 들어옵니다. 그런 마스터의 위스키 취향이 궁금했습니다. 칵테일 제조에 있어서 8할이 밸런스인 사람은 평소 어떤 위스키를 좋아할까. 그래서 물었습니다.
“살면서 단 하나의 엔트리급 위스키를 마셔야 한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부나하벤 12년.” 그는 선정 이유를 “위스키에 비어있는 맛이 없고 밸런스가 좋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마스터 블렌더의 고심이 담긴 엔트리 위스키
부나하벤 제품들 모습. 엔트리는 증류소가 가진 원액의 특징을 합리적인 가격에 엿볼 수 있는 구간입니다. /김지호 기자
보통 스카치위스키는 10년에서 12년 숙성의 위스키를 엔트리급으로 분류합니다. 각 증류소에서 나오는 가장 낮은 등급의 위스키인 셈입니다. 하지만 등급이 낮다고 절대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엔트리는 증류소가 가진 원액의 특징을 합리적인 가격에 엿볼 수 있는 구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다 보니, 각 증류소 마스터 블렌더들의 고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수밖에 없는 게 엔트리급 위스키입니다. 일단 첫인상이 좋아야 애프터를 받을 수 있겠지요.
증류소의 특색도 모르고 무작정 고숙성 제품을 고집하면, 비싼 돈만 쓰고 입맛에 안 맞는 위스키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애당초 피트의 훈제나 ‘불맛’이 싫은데, 숙성 연수만 높다고 맛있게 느끼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엔트리는 이러한 위험 부담을 줄이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숙성으로 가기 전 맛보기 단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부나하벤 12년도 해당 증류소의 첫 관문인 셈입니다.
◇부나하벤 마을의 탄생
1881년 지어진 부나하벤은 아일라섬 북동쪽 맨 끝 해안가에 위치해 있습니다. /인덜지
1881년 지어진 부나하벤은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강 하구’를 의미합니다. 19세기 후반은 위스키 붐과 빅토리아 문화의 정점을 찍었던 시대입니다. 위스키 산업이 영원할 것만 같던 시절이었죠. 그래서인지 부나하벤 증류소의 건축물에서는 대영제국의 웅장함이 묻어져 나오는 듯합니다. 아일라섬 북동쪽 맨 끝 해안가에 있는 부나하벤 증류소는 최첨단 기술과 자동화된 설비를 갖춘 증류소였습니다.
부나하벤 증류소로 이어지는 도로 모습. /인덜지
문제는 너무 외딴곳에 있다 보니 증류소 직원과 가족들이 지낼 주택부터, 도로, 부두까지 모두 새로 지어야 했습니다. 당시 그 비용만 3만 파운드가 넘었다고 하는데 이는 오늘날 한화로 약 44억원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핵실험을 위해 뉴멕시코의 외딴 사막에 새로 마을을 지어야 했던 오펜하이머 프로젝트와도 닮은 듯합니다.
부나하벤 증류소는 스코틀랜드 아일라섬에 있는 9개 증류소 중 유일하게 피트(Peat: 이탄)를 쓰지 않은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역적인 특징인 피트를 내세워 독특한 풍미를 자랑하던 증류소들과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부나하벤 증류소가 처음부터 논(None) 피트 제품을 주력으로 생산한 것은 아닙니다. 부나하벤도 여느 아일라 위스키처럼 시작은 피트였지만, 당시 대중에게 인기가 없음을 인지하고 논 피트로 빠르게 갈아탔던 것이지요.
부나하벤이 본격적인 성공궤도에 오르게 된 계기는 유명 블렌디드 위스키 회사에 원액을 납품하면서입니다. 위스키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커티삭(Cutty Sark), 더 페이머스 그라우스(The Famous Grouse), 블랙보틀(Black Bottle)이 이에 해당합니다. 당시 블렌디드 회사들은 깔끔한 위스키 원액을 선호했기 때문에 부나하벤도 그들의 요구를 충실히 충족시켜야 했습니다.
1960년대 스카치위스키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부나하벤은 플로어 몰팅을 중단하고 1963년에는 증류기를 두 배로 늘렸습니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플로어 몰팅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원액 생산량을 늘렸던 것이지요. 당시 연간 생산량은 약 90만 리터로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많은 위스키를 뽑아내는 증류소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독립 병입 회사에서 부나하벤 원액을 보유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피트 없는 아일라 위스키, 부나하벤 12년
셰리와 버번 오크통에서 숙성한 원액을 섞은 부나하벤 12년. 알코올 도수는 43.6%로 여타 엔트리급 위스키보다 높은 편입니다. /김지호 기자
부나하벤 12년은 아일라 특유의 피트만 뺀 채, 바닷가의 짠기만 머금은 스피릿을 오크통에 숙성한 제품입니다. 즉, 맥아를 건조할 때 피트를 연료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위스키 숙성에 사용된 오크통은 셰리와 버번을 담았던 오크통으로 셰리 25%, 버번 75%를 최종 병입 단계에서 매링(Marrying)해서 출시했습니다. 여기서 매링이란 각각의 오크통에서 꺼낸 원액을 다시 한번 커다란 오크통에서 4개월 내외로 숙성하는 과정입니다. 위스키가 가진 고유한 풍미에 균형을 찾아주는 작업입니다. 자칫 따로 놀 수 있는 맛을 안정화하는 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부나하벤은 12년의 알코올 도수는 46.3도로 여타 엔트리급 위스키보다 높습니다. 또 인공적인 캐러멜 색소를 타지 않았기에 색도 인위적이지 않고 오크통에서 배어 나온 그대로입니다. 냉각 여과도 거치지 않은 제품이라 간혹 헤이즈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으나 오히려 자연스러운 부분입니다. 부나하벤 12년은 1979년에 최초로 출시됐으며,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제품들은 2016년에 개편돼 생산되고 있습니다.
위스키를 한 모금 머금고 있으면, 솔티드 캐러멜과 건포도 맛이 교차합니다. 그렇다고 꾸덕꾸덕한 셰리 위스키를 상상하시면 안 됩니다. 버번 오크통에서 숙성된 위스키가 주는 가볍고 화사한 과일 맛과 말미에는 에스프레소와 다크초콜릿 계열의 풍미가 입안에 맴돕니다. 위스키 사이사이 껴있는 바닷가의 짠맛이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해줘서 맛이 더욱 복합적으로 느껴집니다. 그 어떤 맛도 튀지 않고 골고루 잘 펴 바른 듯한 균형 잡힌 맛이 인상적입니다.
위스키 구매할 때는 늘 신중해야 합니다. 한두 잔 마시고 입맛에 안 맞아서 방치되는 술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정말 궁금한 위스키는 몰트 바에서 꼭 한잔 정도 마셔보고 구매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어딜 가나 엔트리급 위스키는 취급하는 곳들이 많습니다. 한두 잔으로 위스키를 평가하기에는 어려움이 많겠지만 최소한의 방향성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피트의 성지 아일라에서 피트만 쏙 뺀 부나하벤 12년의 매력을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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