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주]당신도 내가 이상한가요?···설리의 마지막 편지 ‘페르소나: 설리’

[오마주]당신도 내가 이상한가요?···설리의 마지막 편지 ‘페르소나: 설리’

〈페르소나: 설리〉는 그룹 에프엑스 멤버 겸 배우인 고 설리(본명 최진리)의 유작이다. 단편 극영화 〈4: 클린 아일랜드〉와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진리에게〉로 구성돼 있다. 〈진리에게〉에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진행한 인터뷰가 포함됐다. 미스틱스토리 제공

[오마주]당신도 내가 이상한가요?···설리의 마지막 편지 ‘페르소나: 설리’

‘오마주’는 주말에 볼 만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콘텐츠를 추천하는 코너입니다. 매주 토요일 오전 찾아옵니다.

자꾸만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게 됩니다. 화면 속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는 마음이 도통 쓰라린 게 아닙니다. 그래도 힘을 내어 끝까지 보면 지금은 우리 곁에 없는 그를 조금 이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룹 에프엑스 출신 배우 고 설리(본명 최진리)의 유작 〈페르소나: 설리〉를 보고 한 생각입니다.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된 이 작품은 설리 주연의 단편 극영화 〈4: 클린 아일랜드〉와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진리에게〉 총 2편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4: 클린 아릴랜드〉는 설리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 프로젝트 〈페르소나〉의 두 번째 시리즈입니다. 당초 5편으로 구성하기로 기획됐지만, 2019년 10월 설리가 스물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제작이 중단됐습니다.

이야기는 빨간 드레스를 입은 ‘4’(설리)가 클린 아일랜드에 도착하면서 시작됩니다. 4는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다는 이곳으로 이주를 원합니다. 그런데 입국 심사장을 통과하려면 죄를 고백해야 한답니다. 4는 도살장에서 살다 왔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돼지를 죽였으니 죄가 많은 셈이죠. 4는 그 중에서도 특별했던 한 돼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어지는 〈진리에게〉는 설리가 세상을 등지기 얼마 전 이뤄진 인터뷰 영상을 중심으로 구성된 다큐멘터리입니다. 아티스트이자 20대 여성으로서 그가 느꼈던 다양한 일상의 고민과 생각을 전합니다.

당시 설리는 ‘기행을 일삼는 여자 아이돌이자 배우’라는 꼬리표로 수년째 악성 댓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피하지 않습니다. 다소 예민할 수 있는 질문도 열심히 고민한 뒤 솔직하게 답변합니다. ‘아이돌도 노동자이냐’는 질문을 받고 한참 고민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는 아이돌도 노동조합이 필요하지 않냐는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가 아이돌 활동을 할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너는 상품”이었다고 합니다. 10년 넘는 그의 연예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되는 대목이죠.

‘상품’이 아닌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대중의 시선은 싸늘해졌습니다. 자유로운 일상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고 여러 이슈에 대한 목소리를 냈을 뿐인데도요. “모든 게 무너지더라고요. 제가 처음으로 제 의견을 말하고 힘들다고 이야기했을 때···.”

[오마주]당신도 내가 이상한가요?···설리의 마지막 편지 ‘페르소나: 설리’

단편 극영화 〈4: 클린 아일랜드〉는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 클린 아일랜드로 이주를 꿈꾸는 ‘4’가 죄를 고백해야만 통과할 수 있는 입국 심사장에서 어느 특별한 돼지 이야기를 하면서 시작된다. 미스틱스토리 제공

[오마주]당신도 내가 이상한가요?···설리의 마지막 편지 ‘페르소나: 설리’

〈진리에게〉에서 설리는 ‘상품’으로 살아가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고백한다. 미스틱스토리 제공

각각 29분, 100분인 두 작품의 러닝타임 대부분을 설리가 홀로 채웁니다. 따로 기획·제작된 두 개 영화는 이질감 없이 묶입니다. 〈페르소나: 설리〉 속 ‘4’ 그리고 돼지의 이야기는 설리의 굴곡진 생애와 겹쳐지면서 더없이 처연하게 느껴집니다. 스스로 세상을 등지기 얼마 전의 모습임을 알고 보는 관객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제게 인상 깊게 남은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진리에게〉 속 JTBC 〈악플의 밤〉 녹화 장면입니다. 스타들이 악성 댓글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었죠. 설리는 이 방송의 고정 출연자였습니다.

게스트로 나온 가수 예은이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밝히고 쏟아진 비난을 이야기하면서 진행자인 신동엽에게 “페미니스트냐”고 묻습니다. 질문을 받은 그가 한참을 머뭇거리자 설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오빠,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럼요) 그럼 페미니스트네요.”

온갖 악성댓글에 시달리는 그 순간에도 설리는 피할 줄 모릅니다. 그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고 합니다. ‘여자는 이래야 해’ ‘여자는 저래야 해’라는 세간의 기준에 자신이 모두 걸린다는 것을요. 그리고 페미니즘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깨달은 세상의 어떤 모순이 그를 자유롭게 했지만, 공격의 빌미도 되었다는 점이 뼈아픕니다.

두 작품을 합쳐 러닝타임은 129분이지만, 한 번에 보긴 어렵습니다. 저 역시 일시 정지 버튼을 수차례 눌렀습니다. 이게 정지 버튼이 아니라 회귀 버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요. 애써 웃는 설리의 아픔이 전해져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볼 가치가 있습니다. 설리는 자신의 마지막 편지를 읽어주길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정지 버튼’ 지수 ★★★★★ 마음이 아파 자꾸만 누르게 되는 정지 버튼

‘회귀 버튼이 필요해’ 지수 ★★★★★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최민지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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