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인생은 어떻게 살면 좋을까. 고향에 작은 집 하나 마련해 책 읽고 텃밭 가꾸며 조용히 살까, 아니면 북적북적한 도시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지낼까. 어디서 살든 자식들 고생 안 시키고 우아하게 마무리하고 싶은데 어떤 선택을 해야 후회하지 않을까.’
60대가 되면, 누구나 한 번쯤 해 보는 질문들이다. 물론 100세 시대의 은퇴 설계라고 하면, 아직까진 많은 사람들이 재정적인 준비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마지막 거처’에 대한 결정이야말로 최우선 순위에 놓고 준비해야 할 부분이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퇴직한 이후에도 살아야 할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현역 시절처럼 외출을 자주 하지 않다 보니 집에 오래 머물게 되며, 힘이 들어서 이사도 쉽게 다니지 못한다. ‘은퇴 후 주거지’는 처음부터 심사숙고해서 골라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서일까.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를 겪은 선진국에선 ‘노후 준비는 집에서 시작해서 집에서 끝난다’고 말할 정도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노인 83% “내 집에서 늙고 싶다”
은퇴한 노인들은 어디에서 살기를 원할까. 2일 경희대 디지털뉴에이징연구소가 보건복지부·보건사회연구원의 노인실태조사(2020년)를 토대로 분석해 봤더니, 대다수 노인들은 ‘살던 집’에서 늙어가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건강한 노인은 86%, 기력이 떨어진 노쇠한 노인조차도 75%가 ‘현재 집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답했다.
‘거동이 불편하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서도, 전체 응답자의 55%가 ‘돌봄 서비스를 받으면서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답했다. 아무리 건강이 나빠져도 이미 오래 살아서 익숙해진 동네에서 벗어나는 건 원치 않는 것이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한유진
‘돌봄, 식사 등 서비스가 제공되는 노인요양시설에 들어가겠다’는 응답자 비중은 32%로 두 번째로 많았다. 다만 건강 상태에 따라 온도차는 있었다. 노쇠한 노인의 경우엔 ‘요양시설에 들어가겠다’는 응답자 비중이 36%로, 건강한 노인(31%)보다는 높았다.
신혜리 경희대 노인학과 교수는 “지역 사회에 계속 거주하는 이른바 에이징 인 플레이스(Aging in Place)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공통 트렌드”라며 “노인들은 대부분 살던 집에서 계속 살기 원하며, 건강이 좋지 않아 원래 집에서 살기 어려워졌다면 그때 일상생활 지원 서비스가 제공되는 주택 입주를 고려한다”고 말했다. 시설에 들어가게 되면, 그 동안 맺어왔던 지역 사회 혹은 이웃 관계망과 단절되기 때문에 불편해도 살던 집에서 계속 살고 싶어한다는 설명이다.
태평양이 한 눈에 보이는 럭셔리 실버타운 18층 베란다에서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 히라노씨./사진=분슌,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정다운
✅황혼 별거한 70대 男이 고른 새 보금자리
그런데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는 식사·청소 등 각종 서비스가 제공되는 ‘럭셔리 실버타운’에서의 삶을 동경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과연 고급 실버타운은 시니어들의 낙원일까? 최근 일본 언론에서 뜨거운 화제를 모았던 77세 남성의 실버타운 2년살이 경험담을 소개한다.
오션뷰 수영장, 노천욕탕, 휘트니스클럽, 가라오케, 극장, 마사지룸, 도서관, 마작룸, 당구장…
도쿄 토박이인 77세 히라노유우(平野悠)씨는 3년 전 치바현 카모가와시에 새로 생긴 럭셔리 실버타운(유료 노인요양시설)에 갔다가 한눈에 반했다. 태평양 바다 바로 앞에 위치한 근사한 22층짜리 신축 건물이었다. 1년 내내 기후도 온화해 도쿄보다 살기 좋을 것 같았다. 아내와는 1년 가까이 말 한 마디 안 하고 지내던 중이었기에 결정도 빨랐다. “집사람과 사이도 안 좋은데, 이러다 내가 치매라도 걸리면 누가 나를 돌봐주겠나, 경치가 좋고 의료 서비스도 잘 되어 있는 여기서 여생을 보내야겠다.”
히라노씨가 2년 거주한 후 퇴소한 치바현의 고급 실버타운./분슌
✅셰프 음식도 금방 질려 결국 ‘집밥’
히라노씨가 선택한 실버타운은 만 60세 이상만 입주 가능한 노인 전용 거주 시설이었다. 그는 방 2개, 화장실 1개, 거실로 이뤄진 20평형을 골랐다. 처음 입주할 때 일시금으로 6000만엔(약 5억3400만원)을 지불했고, 매달 식사와 관리비 등으로 19만엔(약 169만원)씩 냈다. 바다로, 산으로… 첫 1년은 마치 천국에 온 기분이었다. 하지만 점점 일상의 무게에 짓눌리기 시작했다.
입주자들의 평균 나이는 75세. 그런데 전체 입주자의 3분의 1은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노쇠한 환자들이었고, 3분의 1은 지팡이나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움직일 수 있는 노인들이었다. 히라노씨처럼 70대이면서 건강한 노인은 많지 않았다.
부(富)와 연륜을 쌓으며 성공한 인생을 일군 엘리트들과의 지적인 대화를 기대했지만, 허무한 착각으로 끝나버렸다. 히라노씨는 도쿄 신주쿠에 있는 유명 라이브하우스인 ‘로프트(ロフト)’를 설립한 록 음악 전문가다. “록 음악, 들어보셨어요?”라고 물으면서 공통 화제나 관심사를 찾았지만, “엔카(한국의 트로트) 듣는데요”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내가 왕년에 해외 법인 사장이었는데 직원만 5만명이었어.” “아들이 둘인데, 도쿄대 의대랑 법대를 보냈지.” 끝없는 전직, 재산, 자식 자랑에 스트레스만 쌓여 갔다.
유명 셰프가 만든 삼시세끼가 제공됐지만, 진수성찬도 하루 이틀이지 질려서 매일 먹긴 힘들었다. 부엌에서 직접 요리해 간단히 먹는 날이 많아졌다. 태평양이 내다 보이는 노천욕탕에서 만난 한 80대 남성은 “1억3000만엔(약 11억6000만원)이나 내고 입주했는데, 집사람이 ‘도시에서 살겠다’며 혼자 가버렸네…”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석양빛에 물든 태평양 바다가 보이는 실버타운 노천욕탕./사진=분슌
✅‘감옥살이’에 우울해져 2년 만에 퇴소
실버타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히라노씨는 지역 커뮤니티에 눈을 돌려보기도 했다. 실버타운이 위치한 카모가와시는 인구 3만명의 소도시다. 하지만 현지 커뮤니티에 진입하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지역 주민들은 고급 실버타운에서 살고 있는 돈 많은 외지인에게 배타적이었다.
방에 틀어 박혀 지내는 날이 늘었고, 우울증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도쿄로 돌아가고 싶다.”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만약 90세까지 산다고 하면 1억엔이 드는데, 이런 감옥살이를 하면서 시간과 돈을 낭비하긴 싫었다.
결국 히라노씨는 2년 동안의 실버타운 생활을 청산하고 작년 11월 도쿄로 유턴했다. 만기 전 퇴소이기 때문에 1000만엔(약 8900만원)에 가까운 수수료를 내야 했다. 비싼 수업료를 낸 셈이지만, 그는 현재의 도시 생활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
최근 일본 아베마TV 방송에 출연한 히라노씨는 “나이가 들어도 남녀노소가 모여 있는 지금의 주거 환경에서 계속 사는 것이 좋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면서 “두 다리가 성한 건강한 노인이 비싼 돈을 내면서 노인들만 모여 사는 실버타운에 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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