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그냥 사진을 지운 것이 아닙니다. 대륙을 지운 겁니다.”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통신사 AP는 2020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한 청년 기후활동가 기사를 전세계 언론사에 송출했다. 기사에 첨부된 사진에는 타임지(TIME) 역대 최연소 ‘올해의 인물’에 올랐던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와 스위스의 로키나 틸레, 독일의 루이사 뉴바우어, 스웨덴의 이사벨레 악셀손 등 활동가 4명이 나란히 서 있었다.
2020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단체 기자회견 후 우간다 출신 바네사 나카테(맨 왼쪽)와 그레타 툰베리(가운데) 등 환경운동가 5명을 찍은 원본 사진. 오른쪽은 AP가 유일한 흑인이었던 바네사 나카테를 잘라낸 채 송출한 사진. 양철북 제공
하지만 실제로 기자회견을 하고 카메라 앞에 섰던 사람은 5명이었다. 우간다에서 온 대학생 바네사 나카테가 사진에서 옷자락 일부만 남긴채 잘려 나간 것이다. 그는 5명 중 유일한 흑인이었다.
보도된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은 바네사는 자신의 SNS에 생방송으로 동영상을 올렸다.
“제가 활동가로서 별 볼일이 없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아프리카 사람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까요?”
후폭풍은 만만치 않았다. 많은 언론사가 이 일을 보도하고 SNS에는 바네사를 격려하고 AP를 비판하는 글이 쏟아졌다. AP는 결국 성명을 내고 ‘사진 속 유일한 유색인종’인 바네사가 잘려 나갔음을 인정면서도 “시간에 쫓긴 사진사가 구도를 고려하다보니 저지른 실수”라고 해명했다. 그리고 바네사가 다섯 중 가운데에 앉아 있는 사진으로 교체하고, 끔찍한 실수’를 계기로 다양성 교육을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바네사는 AP가 실수했다고 믿지 않았다. 그들은 바네사를 참가자 명단과 기사에서도 지워버렸다.
이 사건은 단순한 인종차별 문제가 아니었다. 바네사는 AP가 자신을 잘라내면서 아프리카 대륙의 기후 활동가들을, 기후 위기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나라가 아프리카라는 사실을 지워버렸다고 주장했다.
AP의 사진 편집 사건 후 2021년 10월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바세나 나카테. 양철북 제공
신간 ‘우리가 만드는 내일은’(양철북)은 아프리카 여성 활동가의 경험을 통해 기후 위기에서조차 인종과 성별, 빈부간 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하는 현실을 신랄하게 보여준다.
바네사를 사진에서 잘라내고 기사에서 없앤 것은 기후 위기에서 선진국이 아프리카를 대하는 태도를 그대로 투영한다. 심지어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로이터와 가디언은 잠비아 출신 인권 활동가 나타샤 므완사와 바네사를 혼동하기도 했다.
많은 언론사와 전세계 활동가들이 그를 위로하고 격려했지만 악플도 적지 않았다.
바네사가 ‘인종차별이라는 카드를 이용해서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관심을 받는다’거나, ‘흑인 여자로서 그런 자리에 초대받아 간 것만으로도 특권을 누린 것이니 거기에 만족하라’는 질타를 받았다. 또 그가 ‘예쁘지 않아서 사진에서 잘렸을 것’이라거나, ‘여자는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어서 과민반응한다’는 식의 성별 고정관념도 마주해야 했다.
무엇보다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아프리카 사람이나 다른 유색인종들이 “기후변화 의제는 백인들을 위한 것이다”, “백인을 위한 것은 백인한테 맡겨라”라며 비난한 것이었다. 기후 위기는 백인들이 신경 쓰는 문제라는 ‘백인 구세주의’에 동조하는 셈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세계 인구의 15%가 살지만, 세계 에너지 관련 이산화탄소 배출량 중 단 2,3%만 기여했다. 이 책이 출간되기 전 국제구호기구 옥스팜은 영국에 사는 사람이 2020년 첫 2주간 배출할 이산화탄소의 양은 우간다나 다른 아프리카 여섯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한 해 동안 배출할 양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런데도 아프리카는 기후변화에 따른 결과에 적응하는 데 드는 비용의 거의 절반을 부담하게 될 것으로 아프리카개발은행은 추산했다.
우간다에서 기후 위기를 알리는 시위를 하고 있는 바네사 나카테.
우간다를 비롯한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이 홍수와 무더위, 가뭄 때문에 생계를 의지하고 있는 작물들이 죽어가며, 식량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기후 비상사태로 빈곤이 더 심화되면서 많은 소녀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됐다. 부모가 음식이나 돈을 받는 대가로 어린 딸을 결혼시킨다.
자원이 가장 적고 기후위기에 가장 적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가장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책은 단순히 수줍음 많던 흑인 소녀가 세계적인 기후 활동가가 되는 과정을 그린 성장기가 아니다. 바네사가 거리에서 국회, 세계무대로 한 뼘씩 나아갈 때마다 맞닥뜨린 수많은 편견과 차별을 통해 기후위기에 담긴 자본주의와 인종차별, 백인 구세주의의 모순, 그리고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고통을 보여준다.
“바네사 나카테는 소름 돋는 일깨움을 주고 있다. 그녀는 우리가 모두 폭풍 속에 있지만, 모두 같은 배를 타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그레타 툰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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