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의사 가운 벗어 던진 전공의들… 의료대란 악화일로
전공의 집단 진료중단을 앞둔 19일 오전 서울시내 한 병원에서 의료진과 환자들이 병동을 오가고 있다. 뉴스1
의과대학 입학정원 확대에 반발하는 전공의(인턴· 레지던트)들이 기어이 흰 가운을 벗어 던졌다. 이른바 ‘빅5’라 불리는 국내 5대 상급종합병원(서울아산·서울대·삼성서울·세브란스·서울성모)을 비롯해 전국 주요 병원에서 전공의 집단 사직이 잇따랐고, 일부는 사직서 수리도 안 됐는데 진료 현장을 이탈한 것으로 확인됐다. 각 병원마다 수술과 입원이 연기되는 등 진료대란이 현실화하고 있는 가운데, 의사단체에 이어 의대 학장들이 의대 증원 정책 철회를 요구하며 정부와 각을 세웠다. 정부는 비상진료대책을 가동하고 미근무 의사들에게 업무개시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환자를 등지지 말아달라”고 거듭 호소했다.
전공의 회장부터 줄사표… 의료대란 현실화
19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가 사직서 제출 시한으로 정한 이날 의료현장에선 대혼란이 빚어졌다. 아주대병원, 부산대병원, 조선대병원, 전북대병원, 충북대병원, 인하대병원, 을지대병원, 제주대병원, 경상대병원, 대전성모병원 등 수십 개 병원에서 전공의들이 무더기로 사직서를 냈다. 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 전공의인 박단 대전협 회장도 이날 사직했다.
보건복지부 직원들이 현장 점검을 하고 있지만, 집단행동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돼 정확한 규모 파악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주말 이전인 16일까지는 서울아산병원, 서울성모병원, 강남세브란스병원, 고대구로병원, 한양대병원 등 23개 병원에서 715명이 개별 사직서를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에 따라 아직 사직서가 수리된 곳은 없다. 복지부는 미근무자에게 업무개시명령을 내리고 불응 시 법에 따른 행정 조치를 취하고 있다.
전공의 집단 진료중단을 앞둔 19일 서울 시내 병원 응급의료센터 입구에서 병상 포화로 진료를 받지 못한 응급환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환자 피해는 속출하고 있다. 이날부터 진료 거부에 들어간 신촌세브란스병원 소아청소년과를 포함해 일부 진료과에선 실제 진료 공백이 발생한 것으로 전해졌다. 세브란스병원 수술 일정은 이미 절반가량 취소됐고, 다른 병원들도 급하지 않은 수술을 미루고 병동을 축소 운영하는 등 비상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환자들은 수개월 기다린 수술이 연기돼 불안에 떨고 있다. 암환자들이 모인 온라인 카페에도 “궤양이 커지거나 전이될까 두렵다” “언제 치료받을 수 있을지 몰라 막막하다”는 사연이 잇따랐다. “환자를 볼모로 삼은 집단이기주의”라며 의사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크다.
국내 수련병원에서 일하는 전공의 수는 1만3,000여 명이다. 빅5 병원의 경우 병원별로 전체 의사 대비 전공의 비율이 적게는 34%에서 많게는 46%에 이른다. 대전협이 진료 중단 시점으로 공언한 20일 이후 얼마나 많은 전공의가 실제로 의료현장을 떠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응급실과 중환자실, 수술실 등 생명과 직결된 필수의료 분야 인력까지 빠져나가면 ‘응급실 뺑뺑이’는 물론 환자 사망 등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될 거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의대 학장도 의사계 두둔… 대치 전선 확대
의사계는 대정부 전선을 넓히는 양상이다. 20일부터 동맹휴학을 예고한 의대생과 총파업을 결의한 의사단체에 이어서 학술단체, 의대 학장까지 가세했다. 가장 먼저 집단 휴학계를 제출한 원광대 의대생 160명은 지도교수 설득에 휴학 신청을 철회했지만, 의대 개강 시즌을 맞아 수업 거부 움직임이 가시화하고 있다. 이날이 개강일이었던 충북대 의대는 학생들의 수업 거부로 개강일이 다음 달 1일로 연기됐다.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서를 제출한 19일 서울 시내 해당 대형병원 어린이병동이 환자와 보호자들로 붐비고 있다. 하상윤 기자
개원의 중심인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이날 대국민 성명을 내고 “정부가 의사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무시하고 억압에 저항하는 정당한 목소리를 국민과 환자에 대한 위협인 것처럼 호도한다”고 주장했다. 25일에는 대정부 규탄대회를 열고 회원들을 대상으로 파업 찬반 여부를 묻는 투표를 진행할 계획이다. 194개 의학 학술단체를 총괄하는 대한의학회도 “의학교육의 질이 훼손되지 않는 방안과 과학기술의 미래를 파괴하지 않는 방안을 마련한 후 의대 증원 정책을 추진하라”면서 “전공의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전공의들을 보호하겠다”고 선언했다.
전국 의대 학장 단체인 한국의과대학ㆍ의학전문대학원협회도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2,000명 증원은 단기간에 수용 불가능하다”며 의대 증원 계획 철회를 요구했다. 앞서 40개 의대는 지난해 11월 복지부가 실시한 수요조사에서 2025학년도에 최소 2,151명 증원을 원한다고 답했으나, 학장들은 이날 “증원 규모는 350명 정도가 적당하다”며 기존 입장을 번복했다. 의대생 동맹휴학 움직임에 대해선 우려를 표하면서도 “학생들의 요구가 정당하며 제자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두둔했다.
정부 ‘의료유지명령’ 발동… 시민사회 “담합 고발 검토”
의사 집단행동에 정부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날 복지부는 집단행동 교사 금지 명령을 위반한 혐의로 의협 집행부 2명에게 의사면허 정지 행정처분에 관한 사전 통지서를 발송했다고 밝혔다. 앞서 221개 수련병원에 ‘필수의료유지명령’을 내린 데 이어 전체 전공의를 대상으로 ‘진료유지명령’도 발동했다. 명령에 불응하면 의료법에 따라 의료업 1년 정지, 의료기관 폐쇄 등 처벌을 받게 된다. 복지부는 의료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응급·중증수술 중심 인력 재배치, 비대면 진료 확대, 공공병원 진료시간 연장, 국군병원 응급실 개방 등 비상진료대책도 즉시 가동했다. 피해를 입은 환자에겐 상담과 법률 지원이 제공된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이 19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 브리핑에서 전국 221개 수련병원 전공의들에게 진료유지명령을 발령했다. 연합뉴스
시민사회도 들끓고 있다. 양대 노동조합을 비롯해 보건의료노조, 참여연대 등 40여 개 시민단체가 모인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비판하며 “전공의들이 더욱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위해 요구해야 할 것은 노동조건 개선과 의사와 간호 인력 확충이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전공의들이 실제로 진료를 중단하면 담합 행위로 공정거래위원회에 고발하겠다고 밝혔고, 보건의료노조도 의사 집단행동을 막기 위해 ‘국민 촛불운동’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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