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어드는 국내 예술가 레지던시
흔들리는 ‘예술가들의 산실’
서울시 쓰레기 소각장 신설에
난지창작스튜디오 내년 문닫아
지자체 우선순위 밀리면서
인천아트플랫폼도 잠정 중단
경기·대구·광주도 지원 축소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서울시립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전경. 지난 18년간 예술가들의 산실 역할을 했지만, 서울시가 이 일대에 광역자원회수시설(쓰레기 소각장)을 짓기로 하면서 내년 1월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게 됐다. 서울시립미술관
그동안 신진 작가들의 창작 활동을 뒷받침해온 국내 예술가 레지던시(입주 창작공간) 지원 프로그램이 흔들리고 있다. 미술계에서 젊은 작가들의 등용문처럼 여겨졌던 주요 레지던시가 올해 들어 잇달아 운영을 중단하거나 예산이 줄어든 탓이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국내 작가들이 공신력 있는 레지던시 경험을 발판 삼아 전시를 하거나 작품을 알릴 수 있는 기회도 크게 줄어든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25일 미술계와 서울시·서울시립미술관(SeMA)에 따르면, 서울시립미술관이 운영 중인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는 내년 1월부로 운영을 종료한다. 서울시가 이 일대에 광역자원회수시설(쓰레기 소각장)을 신설하기로 하면서 더 이상 공간을 사용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가 신설된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18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9월 께 레지던시 입주 작가를 선정해왔지만, 올해는 공모 진행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은 향후에도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지속될 수 있도록 스튜디오를 이전하겠다는 계획이지만, 총 2072㎡(약 626평)를 차지했던 스튜디오 공간을 단기간 옮기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별도의 공간을 마련한다 하더라도 한정된 예산 안에서 스튜디오를 새롭게 꾸미려면 지원 규모가 축소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미술계 관측이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는 지난 2006년 당시 서울시가 난지한강공원과 노을공원, 하늘공원 사이의 폐쇄된 침출수 처리장을 개조해 만든 공간이다. 작가들에게는 창작 공간으로, 시민들에게는 현대미술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서울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산실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지난해 8월 서울시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가 위치한 상암동 481-6 등 2개 필지를 신규 소각장 입지로 최종 선정했고, 현재 소각장 건립을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립미술관 관계자는 “창작스튜디오를 옮길 만한 유력 후보지 몇 군데를 찾았다”면서도 “현재 단계에서 지원 규모를 가늠하긴 어려운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시 관계자 역시 “아직은 확정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밝혔다.
인천 중구 인천아트플랫폼(IAP)의 레지던시 창·제작 프로젝트 일환으로 입주 작가의 개인전이 진행된 G1 전시관. IAP 레지던시는 인천시가 일반 시민들을 위한 공간을 확대하기로 하면서 올해 1월부터 운영이 잠정 중단됐다. 인천아트플랫폼
지난 2010년 출범한 수도권의 또 다른 주요 레지던시 프로그램인 인천아트플랫폼(IAP) 레지던시도 지난달부터 운영을 잠정 중단한 상태다. 당초 인천시는 지난해 10월 인천 중구에 위치한 인천아트플랫폼에서 레지던시를 축소 이전하거나 아예 기능을 폐지하는 방향을 담은 ‘인천아트플랫폼 운영개편안’을 내놓은 바 있다. 일반 시민들을 위한 시설을 확대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일방적인 정책 추진에 예술계가 반발하면서 시는 부랴부랴 재검토에 나섰다.
인천시는 오는 28일 공개토론회를 열고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향후 인천아트플랫폼의 운영 방향을 최종 결정하겠다는 계획이다. 인천아트플랫폼 관계자는 “올해도 정상적으로 레지던시를 계속 운영할 계획이었다면 작년 하반기에 공모를 했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한때 인천아트플랫폼에는 레지던시 공모를 기다리던 신진 작가들의 문의가 쇄도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경기 안산의 경기창작센터는 경기도가 복합문화시설로 탈바꿈하겠다며 올해 재개관을 목표로 시설을 개보수하면서 2021년부터 레지던시 운영을 중단한 상태다.
지방도 사정은 비슷하다. 대구시는 지난해 초 대구 달성군 가창창작스튜디오의 문을 닫았다. 광주 동구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레지던시는 올해 작가 지원 예산이 지난해 대비 30~40%가량 축소됐다. 최근 정부의 전반적인 예산 감축 기조 가운데 창제작 센터 리뉴얼 공사까지 하면서 실질적인 지원 예산이 줄어든 것이다. 다만 ACC 관계자는 “입주 작가 모집 인원은 그때그때 예산과 상황에 따라 늘어날 때도 있고 줄어들 때도 있다”고 설명했다.
예술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지역관광 활성화, 문화도시 조성 등을 키워드로 지방자치단체들이 작가들과의 협업 기회를 늘리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했었다. 하지만 이후 20년 가까이 시간이 흐르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 미술계 관계자는 “결국 피부에 와닿지 않는 예술가 지원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또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일부 민간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축소되기도 했다. 일례로 OCI미술관은 국내 작가들을 대상으로 했던 ‘OCI 창작스튜디오’의 운영을 3년 전 중단했다. OCI미술관 관계자는 “당시 인천의 스튜디오 공간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운영을 잠정 중단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민간에서 운영하는 레지던시는 국내 작가 육성보다는 해외 작가들과의 교류에 좀 더 초점을 두는 경우가 많다. 최근 한국 문화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높아진 영향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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