궂은 비 내리는 л‚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
이 노래에 등장하는 도라지 위스키는 가짜다. 1950년대 말 부산 국제양조장이 주정(酒精)에 색소와 위스키 향료를 섞어 만들었다. 이름은 위스키지만 위스키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당시 옛날 다방에서 팔던 가장 비싼 메뉴였다.
‘도라지’라는 이름은 일본 산토리 위스키 토리스(Torys)에서 땄다. 처음에는 도라지 대신 도리스라는 이름을 썼다. 그러나 왜색 불법 상표 도용 논란에 상표 분쟁으로 사장이 구속되자 뒤늦게 이름을 도라지로 바꿨다.
진작 사라졌던 가짜 일본 위스키는 올해 다시 국내 주류 시장을 배회하고 있다.
4일 주류업계에 따르면 일본산 가짜 위스키가 국내에 속속 등장해 시장을 교란하고 있다. 대부분 일본 방문객이 현지에서 직접 사 들여온 제품이다.
일본 위스키는 국내 애호가 사이에서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일본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이 꼭 사와야 할 제품 목록에 수시로 오르내린다.
그러나 일본 현지 언론과 주류 전문가들은 최근 ‘가짜 일본 위스키를 주의하라’고 입을 모아 경고했다.
지난달 일본 주류 경매기업 유리엘(Uriel)과 주류 칼럼니스트 이카리(イカリ)는 ‘일본 최대 위스키 제조사 산토리 대표제품 야마자키(山崎)·하쿠슈(白州)·히비키(響) 가품(니세모노·偽物)이 주류 판매점과 어플리케이션, 개인 간 거래 같은 광범위한 방법으로 무분별하게 시장에 퍼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들은 일반 소비자가 가품을 구분할 수 있도록 간단한 구별법을 제공했다. 이 구별법에 따르면 병목 부분에 양각(陽刻)한 회사명이 얇거나 정면 상표 상단 부분 금색줄에 명암이 들어가 있지 않으면 가품일 가능성이 크다. ‘병 째 흔들었을 때 거품이 많이 올라오는 위스키도 의심해볼 만 하다’고 덧붙였다.
해당 논란은 우리나라에도 빠르게 퍼졌다.
최근 국내 위스키 관련 주요 커뮤니티에는 ‘논란 이후 찾아보니 홋카이도 주류 전문점에서 산 일본 위스키 표면에 명암이 안보인다’, ‘정품 홀로그램이 없고, 술이 담긴 박스가 조잡하다’ 같은 글이 줄지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주로 소규모 주류 전문점에서 해당 위스키를 산 소비자가 가품 가능성을 호소했다. 이들 소규모 주류 전문점은 온라인 웹사이트에 최저가를 내세워 소비자를 불러 모은다.
아마존재팬 같은 유명 인터넷 쇼핑몰, 일본판 당근 같은 프리마, 메루카리에서 산 일부 위스키 역시 가품 판정을 받았다. 일본은 인터넷에서 개인 간 주류 거래가 가능하다. 저렴한 가격에 혹해 호텔로 위스키를 택배 주문한 소비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피해를 입었다.
최근에는 병목에 중국 수입인지(收入印紙)가 붙은 가품 위스키가 나타났다. 이런 위스키는 진품 위스키가 담겨 있던 빈 병에 가짜 술을 넣어 만든다.
우리나라 유흥주점이 가짜 양주를 만들어 유통하던 방법과 비슷하다. 소위 ‘병갈이’라 부르는 수법이다. 병갈이로 만든 가짜 위스키는 병이나 겉 상표를 유심히 살펴봐도 가품 여부를 구분하기 어렵다.
일본에서 병갈이로 만든 가짜 위스키는 한때 사회적인 문제였다.
2018년 8월 일본 수사당국은 가짜 ‘히비키 30년’ 위스키를 만든 혐의로 2명을 검거했다. 이들은 히비키 30년 빈 병을 구해 저렴한 위스키를 채우는 방식으로 가품을 만들어 유통했다. 당시 히비키 30년 1병 거래가는 500만원 정도였는데, 이들은 가품 위스키 1병을 200만원에 팔았다.
2018년은 일본 위스키 1차 붐이 일어났던 시기다. 당시 하쿠슈 12년과 히비키 17년은 증류 원액 부족이 심각해져 판매를 일시 중지했다. 판매 중단 이후 이 위스키는 인터넷에서 고가에 팔렸다.
전문가들은 최근 일본 위스키 가품이 급격하게 늘어난 이유 역시 공급 부족에서 찾았다. 일본 위스키는 지난해 전 세계적인 전성기를 맞았다. 인기가 치솟자 산토리는 다음달부터 히비키 30년, 야마자키 25년 소매가를 16만엔(약 140만원)에서 36만엔(약 315만원)으로 한 번에 125%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인상에 앞서 위스키를 구하려는 수요가 급증했다. 주류 전문점 가운데 상당수가 이전처럼 까다롭게 가품 위스키를 선별하는 대신 물량 확보에 집중했다. 전문가들은 이 과정에서 가품 위스키 상당 수가 주류 전문점으로 흘러 들어왔다고 평가했다.
다른 국가 고가 위스키 역시 가품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BBC는 2010년대 후반부터 고가 스카치 위스키 위조품이 시장에 돌고 있다고 수차례 지적했다.
2018년 영국 규제당국이 싱글 몰트 위스키 55병을 실험한 결과, 38%에 해당하는 21병이 위스키가 다른 성분과 희석하거나, 연도를 거짓 표기해 물의를 빚었다. 이런 가품 위스키 역시 전 세계 소규모 주류 전문점 혹은 대형 경매장 곳곳에 등장했다.
김주한 미국 미네소타 블루브릭바 바텐더는 “여러가지 가짜 위스키 구분법이 있지만, 핵심은 결국 ‘누가 파는지, 얼마에 파는지’ 두 가지”라며 “인터넷 사이트나, 지나가다 우연히 들어간 주류 전문점에서 일반 시세보다 싼 가격에 희귀 위스키가 보인다면 행운이라고 생각하기 앞서 의심부터 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술에 전문적인 식견이 없는 일반 여행객이라면 공항 면세점이나 여러 체인을 가진 대형 주류 판매점, 해당 국가 유통 권한을 가진 수입사 라벨이 붙은 제품을 사는 편이 안전하다”며 “본인이 전문가라 생각하는 수집가들도 가품이 넓게 퍼지는 지금 시기에는 이전보다 꼼꼼히 제품을 살려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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