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를 가다] 첫 이민 후 수교까지 103년 걸렸다…초기 한인촌엔 기념비만

한인 모여 살며 문화 계승했던 아바나 동쪽 100㎞ 마탄사스 엘볼로 마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자금 모금 구심점…지금은 옛 흔적 거의 다 사라져

‘독립운동가 임천택’ 딸 “수교 계기로 사적지 보존 등 힘써 줬으면”

[쿠바를 가다] 첫 이민 후 수교까지 103년 걸렸다…초기 한인촌엔 기념비만

쿠바 마탄사스 한인 이민 기념비

(엘볼로[쿠바 마탄사스]=연합뉴스) 이재림 특파원 =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약 100㎞를 차로 달리면 마탄사스주(州) 엘볼로 마을에 닿는다.

아름다운 풍광의 해안가 도로를 거쳐 2시간가량 걸리는 여정 중간에는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교량(103.5m)인 바구나야구아 다리도 지날 수 있어서, 처음 오는 사람이라면 마냥 지루하지만은 않은 길이다.

주변 지역 길눈이 밝은 쿠바 토박이 택시 기사는 그러나 지난 16일(현지시간) 목적지 근처에 와서 잠시 머뭇거렸다.

“이 길로 들어가는 게 맞느냐”며, 지나쳤던 샛길 쪽으로 잠시 후진해 비포장 흙바닥 도로로 차를 돌렸다.

‘팝니다’라는 글귀가 나붙은 목조주택 몇 채를 지나 도착한 곳에는, 철제 보호대로 둘러쳐진, 눈에 띄는 구조물이 우뚝 솟아 있었다.

2005년 건립된 마탄사스 한인 이민 기념비다.

[쿠바를 가다] 첫 이민 후 수교까지 103년 걸렸다…초기 한인촌엔 기념비만

마탄사스 한인 이민 기념비 표지석 살피는 마르타 임 선생

한국식 기와를 형상화한 빨간색 지붕과 파란색 원형 중심부를 길쭉한 하얀색 지지대들로 받치고 있는 이 시설은 미국 시애틀 한인연합장로교회의 도움을 받아 세워졌다.

한인 후손들의 요청으로 기념비 출입구 열쇠 등을 보관하며 관리를 맡아주고 있는 마을 주민 마리아 씨는 “저는 1977년부터 이곳, 엘볼로에 살고 있다”며 “이 마을은 예전에는 한인 커뮤니티가 형성돼 있던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쿠바를 가다] 첫 이민 후 수교까지 103년 걸렸다…초기 한인촌엔 기념비만

마탄사스 한인 이민 기념비 표지석

엘볼로는 1921년 쿠바 첫 한인 이민자들이 대부분 모여 살았던 정착촌이다.

1905년 멕시코로 넘어와 에네켄(‘애니깽’) 농장 등지에서 일하던 일부 이민자들이 10여년 후 마나티 항구를 통해 쿠바로 들어온 뒤 마탄사스로 이주해 엘볼로 마을에 터를 잡았다.

이민자들은 이곳에서도 에네켄 수확 등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고국 역사와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 한국학교를 세우고 한인회를 설립해 전통문화를 계승했다고 한다.

엘볼로가 있는 마탄사스는 일제 강점기 이역만리 쿠바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데 중요한 구심점이 된 지역이기도 하다.

[쿠바를 가다] 첫 이민 후 수교까지 103년 걸렸다…초기 한인촌엔 기념비만

쿠바 마탄사스 엘볼로 마을

일제 강점기 쿠바 한인들은 임천택(1903∼1985·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선생을 중심으로 광복군 후원금 등을 모아 모국에 보냈는데, 이는 ‘백범일지’에 “쿠바에서는 임천택 등이 임시정부를 후원하고…”라고 서술되기도 했다.

한인 이민자들이 뿌리를 내린 지 103년 지나 이뤄진 한국·쿠바 수교를 계기로 찾은 엘볼로에는 그러나 옛 흔적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이번 방문길에는 임천택 선생의 딸인 마르타 임(임은희·85) 씨가 동행했는데, 임씨는 연방 “저곳에 우물터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이곳엔 집이 없었는데 생겼다”, “저 벽돌집 자리에는 원래 나무집이 있었다”고 아쉬움을 담아서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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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마탄사스 엘볼로 마을 주택

[쿠바를 가다] 첫 이민 후 수교까지 103년 걸렸다…초기 한인촌엔 기념비만

엘볼로 마을 옛 우물터

아바나와 엘볼로 마을을 오가며 수시로 현장을 둘러보고 있는 문윤미 쿠바 영사협력원도 “마을 중간에 있는 큰 나무 아래에 평상을 놓고, 그곳에서 윷놀이도 하고 어르신들이 담소도 나눴다고 한다”며 “현재 그 자리는 현지 주민 집 마당으로 변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마탄사스 시내와 가까운 옛 대한인국민회 마탄사스 지방회관(1943∼1951) 터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곳은 임천택 선생의 자택이기도 했는데, 당시 나무로 지어졌던 집은 허물어지고 시멘트 건물이 들어섰다. 현재는 1층에 카페가 자리하고 있다.

[쿠바를 가다] 첫 이민 후 수교까지 103년 걸렸다…초기 한인촌엔 기념비만

옛 대한인국민회 마탄사스 지방회관 터(가운데 붉은 건물 자리)

한창 엘볼로 마을 주변을 살피던 중 만난 주민 비올레타 로사리오(94)는 “내 주거지가 예전에 한인이 살던 곳이라고 들었다”며 선뜻 집 안으로 안내해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잔뜩 녹슬어 ‘끼익’하는 소리를 내는 쇠창살 문을 지나 작은 텃밭을 지나쳐 나무로 만든 문을 열고 들어가니, 높은 천장과 넓은 방이 눈에 들어왔다.

로사리오 씨는 “안쪽도 엄청 넓다”고 설명했지만, 다른 가족들도 있어서 오랫동안 머물며 구석구석 살펴볼 수는 없었다.

[쿠바를 가다] 첫 이민 후 수교까지 103년 걸렸다…초기 한인촌엔 기념비만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엘볼로 마을 주민 로사리오 씨

다만, 집 내외부 모두 별다른 리모델링 흔적 없이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적지 등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질 수는 있겠지만, 엘볼로 마을의 역사성을 고려하면 매입 등을 통해 활용 가능성을 검토할 만한 부분이 있어 보였다.

마르타 씨는 “한인 후손과 한국 국민 간 접촉이 더 쉽고 빠르게 이뤄진다면 좋겠다는 게 오랫동안 가졌던 바람”이라며, 수교를 계기로 한인 정착촌과 현지 독립운동 사적지 보존 등에 획기적 전기가 마련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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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리오 씨 집 내부 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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