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루터는 95개조, 츠빙글리는 67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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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한 달도 이제 사흘 남았습니다. 새해 결심들은 얼마나 실천하고 계시는지요. 작심삼일이라고 너무 자책하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매일 매일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결심하고 또 실천하고 하면 좋겠습니다. 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의 한 주인공인 프랜시스 쉐퍼 목사는 젊은 시절 그리스 철학과 고전에 심취했다가, 그래도 기독교인이니 성경을 한번 읽어보자고 통독을 시작했는데요. 6개월 만에 1독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통독을 하면서 그리스 철학이 제기한 문제의 해답을 모두 얻었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저절로 철학이 던진 의문이 해결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부터 평생 6개월마다 성경 통독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체험과 꾸준함은 결국 그를 기독교 사상가로, 특히 ‘실존적 기독교’를 추구하고 ‘라브리’를 창설하는 데 원동력이 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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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노 시몬스 모습.

매주 그렇지만 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에도 보석같이 빛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이들 대부분은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말씀에 합당한 믿음과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들은 과감히 제거하거나 거부했습니다. 제도화된 교회가 주입하는 신앙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참된 신앙을 따르려고 했던 것이지요. 이번 한 주도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주일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츠빙글리에겐 ‘67개 논제’가 있다

1523년 1월 29일 스위스 종교개혁자 울리히 츠빙글리는 600여명의 청중이 모인 취리히 논쟁에서 자신의 67개 논제를 성공적으로 변호했습니다. 그는 오직 성경에 호소하며 교황의 권위, 미사, 성인 숭배, 금식 기간과 절기, 성직자 독신주의를 거부했습니다. 당시에 이 같은 주장은 기존 가톨릭교회를 뒤엎는 행동이었는데, 취리히 시의회는 “울리히 츠빙글리는 (다른 지시를 받을 때까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거룩한 복음과 참된 신성한 성경을 계속해서 오랫동안, 그리고 그 정도까지 설교할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츠빙글리가 성경을 근거로 논리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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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세례파의 한 분파인 미국 아미쉬 마을 사람들의 모습. 문명과 거리를 두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평화주의와 용서를 지향한다.

앞서 츠빙글리는 종교개혁을 전개합니다. 성경적 신앙과 생활 회복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모든 관습을 금했습니다. 성상 파괴, 파이프 오르간 제거, 신부와 수녀, 수도사들의 결혼, 포도주와 함께 평신도들의 성만찬 참여 등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성상 파괴는 예상치 못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래서 1523년 성상 및 미사에 관한 두 번째 대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츠빙글리는 이 토론회에서 67개 논제를 변호하면서 그의 종교개혁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는 개혁이 질서 있게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성상을 제거하되 무질서하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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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토론회를 마치고 ‘간단한 그리스도교 입문’이란 책을 썼습니다. 이에 개혁은 점진적으로 진행되었고 목회자들과 시의원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는 당시 가톨릭교회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했습니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미사 오르간 제단 축제행렬 성유물 성상 견신제도 도유행사 등이 사라졌습니다. 결혼법과 관습법은 모두 의회 권한으로 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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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라브리 홈페이지.

‘메노나이트’라는 이름의 유래는?

1536년 1월 30일 가톨릭 사제 메노 시몬스(Menno Simons)가 성육신에 대한 의구심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를 떠나 아나뱁티스트(재세례파) 운동으로 개종하고, 곧 재세례파를 이끌게 됩니다. 그는 네덜란드 아나뱁티스트연맹에 가입했는데 후에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이름을 따서 ‘메노나이트’(Mennonites)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메노나이트는 다른 과격 아나뱁티스트처럼 박해를 겪어야 했으나 1세대 사람들처럼 과격주의를 피했습니다. 시몬스는 평화주의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이라 확신, 과격한 혁명의 아나뱁티스트들과는 멀리했으며 기독교인은 일체의 맹세와 서약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 성경에 어긋나지 않는 한 세속 정부에 복종해야 할 것이라고 가르쳤으며 세례는 신앙을 고백하는 성인에게만 시행했습니다. 세례와 성찬은 하나님과 신자 사이 내면적 관계의 외부적 표식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서 시몬스와 추종자들은 세족식도 했습니다.

메노나이트는 맹세나 군 복무를 거부했습니다. 이에 많은 정부에 의해 반역 경향이 있는 세력으로 간주됐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기존 교회로부터 이단 등으로 낙인찍혔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핍박을 피해 동유럽, 특히 러시아로 흩어졌습니다. 나중에 북아메리카로 떠나 미국의 경우 펜실베이니아주에 정착해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미쉬가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또 19~20세기에 걸쳐 남미로 이민해 비교적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살아갔습니다.

20세기에 메노나이트는 여전히 평화주의 입장을 고수했으며 사회봉사를 통해 많은 이들의 찬사와 존경을 받았습니다. 1561년 1월 31일 메노 시몬스는 독일 부스텐펠트에서 별세했습니다.

프란시스 쉐퍼와 실존적 기독교, 그리고 라브리

1912년 1월 30일 복음주의 선교사, 철학자, 작가, 강연가인 프란시스 쉐퍼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저먼타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평생 구도자와 전도자의 마음으로 살다간 스승으로 불립니다. 피난처 또는 쉼터라는 뜻의 ‘라브리’를 창설해 젊은이들의 솔직한 질문을 받으며 복음에 합당한 대답을 해왔습니다. 또 인생의 온갖 문제의 대답을 찾기 위해 누구나 잠시 머물렀다 갈 수 있는 영적 피난처를 제공해왔습니다. 라브리는 현재 국제적 단체로서 미국 스위스 영국 네덜란드 캐나다 한국에 지부를 두고 있습니다. 쉐퍼는 C S 루이스 이후 서구 기독교 변증학의 신개념을 창출한 인물로 평가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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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발도의 동상 모습.

쉐퍼는 1930년 복음 전도자 앤서니 지올리의 천막집회에 참석했다가 회심, 전 생애를 그리스도께 드리기로 헌신했습니다. 1935년 6월 26일 중국내지선교회 선교사의 딸 에디스 세빌과 결혼한 이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입학, 미국 교회 내 분리주의 여파로 이후 페이스신학교로 전학합니다. 1938년 그로브시티 커버넌트장로교회에서 3년, 1943년부터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성경장로교회에서는 5년간 담임목사로 사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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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쉐퍼는 3개월간 전후 유럽의 신학적 기류, 특히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에 대한 우려와 그 영향을 파악하기 위해 미국 기독교연합회 총무 자격으로 유럽을 방문, 주요 기독교 지도자를 만났습니다. 한편 유럽의 유명 미술관과 유적지를 돌아보며 문화예술에 대한 안목을 넓히게 됩니다. 이 짧은 여행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습니다.

1948년 장로교해외선교국제위원회 선교사로 유럽에 파송을 받습니다.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그는 평생의 영적·지적 동료가 될 미술학자 한스 로크마커를 만납니다. 쉐퍼는 그를 통해 예술에 대한 오랜 관심과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1951년 심한 영적 고뇌 속에서 신앙적 위기도 만났습니다. 산책과 건초더미 창고를 오가며 자신의 신앙과 기독교를 원점에서 다시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영성의 출발점을 잘못 잡았음을 깨닫습니다. 진리가 아니라 율법주의 또는 근본주의적 행실에 기반을 둔 신앙이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나는 너무 오랫동안 잘못된 영성의 기차를 타고 있었다. 내가 탔던 그 기차는 1930년대에 유행한 분리주의 운동이었다. 그것은 나만이 신앙적 영적으로 깨끗하다고 하는 영적 교만이었다”고 말하고 엄격한 분리주의 진영과 거리를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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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퍼의 영적 위기는 인생의 대전환점이 됐습니다. 로마서를 통해 발견한 진정한 영성의 출발점은 하나님과의 ‘초자연성’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적 은혜를 순간순간 믿는 것(moment by moment trust)’였습니다. 여기에 어떤 제도나 전통, 형식, 운동, 조직을 더하면 그것은 거짓 영성임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자서전을 쓴 콜린 듀리에즈는 쉐퍼의 이런 영성을 ‘실존적 유형의 복음주의’ ‘실존적 기독교’(existential Christianity)라 규정했습니다. 즉 현 순간에 충실한 삶, 실존적 현실을 포용하는 태도,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죽음과 부활에서 찾는 입장,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일어나는 회심에 개입하시는 성령의 역사와 그 순간부터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사실 등을 모두 포괄하는 신앙입니다. 그의 이 같은 실존적 기독교는 당시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1955년 7월 1일 라브리 공동체를 설립, 영국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등에서 강연하면서 영국에서 라브리 사역을 시작합니다. 라브리 사역에서 그는 ‘정직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대답(Honest Question, Honest Answer)이라는 깃발을 들고 성경의 절대 진리성을 선포하며 스위스의 산골에서 젊은이들을 위한 변증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타임’지에서는 이 라브리 사역을 ‘서양 세계에서 보기 드문 선교 사역의 하나’로 소개했습니다.

그는 라브리 사역을 통해 이른바 ‘복음의 다리놓기’라는 문화 변증학을 시도했습니다. 상대방의 문화적 배경과 갈등의 실체를 파악해 적절한 복음의 다리를 찾았던 것입니다. 그는 대중 집회뿐 아니라 대화와 토론에서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쉐퍼는 라브리 간사들에게 종종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과 이야기할 시간이 60분이 주어진다면 상대방의 말을 듣는 데 50분을 쓰고 당신들이 말하는 데는 단지 10분만 쓰라.”

그는 등 그의 대표작들을 출간했습니다. 미국 크리스채너티투데이는 쉐퍼에 대해 “1960년대와 1970년대 복음주의 부활의 주역이었던 그는 서구 문화의 쇠퇴를 상대주의의 부상으로 분석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등 영화 시리즈도 제작해 문화 속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데 힘썼습니다.

12세기에도 개신교인이 있었다, 발도파 사람들

1686년 1월 31일 개신교를 용인한 낭트 칙령을 취소한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모든 발도파 교회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사랑과 청빈한 삶을 강조하는 종교개혁 이전의 전통을 이어온 발도파 기독교인들은 곧 황폐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당시 2000명이 죽고 2000명이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8000명이 투옥되었습니다.

이들은 ‘발데스 복음주의’ 또는 ‘왈도파’ ‘발도파’ 등으로 불립니다. 12세기 프랑스에서 발생했습니다. 재산가였던 발도(Peter Waldo)가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1176년 재산을 모두 빈민들에게 나누어준 뒤, 그리스도의 사도나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처럼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설교에 전념했습니다. 그의 설교에 감동한 사람들은 2명씩 조를 짜 리옹의 빈자라 이름 짓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로마교회에서는 복음이 잘못 전해질까 우려해 설교를 금지했습니다. 그럼에도 발데스가 설교 활동을 계속하자 교황 루키우스 3세는 1184년 칙서를 발표해 발도파를 이단으로 단죄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로마교회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발도파 교리에는 로마교회와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연옥을 인정하지 않았고 죽은 자를 위한 연미사, 속죄를 위한 보속 등에 반대했습니다. 서약이나 유혈을 거부했습니다. 또 단순한 성서주의, 엄격한 도덕,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두 가지 점에서 주변 사람들과 구별되었다고 합니다. 첫째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특히 산상수훈에 절대적으로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모든 형태의 폭력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전쟁, 특히 십자군 전쟁의 폭력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법원에서 행해지는 ‘합법적’ 폭력에도 반대했습니다.

둘째 마태복음 5장 33~37절에 근거해 선서를 거부하고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관행에 반대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당시 종교계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발도파 사람들을 위험한 반란군으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리용 부근에서 시작해 점차 프랑스 전역으로 세력을 넓혀가다가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헝가리 폴란드 등 인근 국가로 전파되었습니다. 1217년 발데스가 세상을 떠난 후 박해가 더 심해졌고 종교재판 등 엄격한 조치를 받으며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결국 16세기 종교개혁으로 개신교에 흡수됐으나 그 일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국경지대와 알프스의 보도와 계곡에 잔존했습니다.

1848년 발도파는 완전한 시민권을 되찾았고 1855년 토리노에 독자적인 신학교를 세웠으며 대부분 우루과이로 이민을 떠났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몬태나주에 발도파 장로교회를 세웠습니다. 나머지는 이탈리아와 남북아메리카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미국 크리스채너티투데이는 “발도파 이야기는 성경에 대한 헌신과 인내의 이야기다. 이들은 ‘가장 오래된 복음주의 교회’로 불렸고 피에몬테 알프스 계곡에서 고집스러운 이단자들과 싸우며 자신들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프스의 이스라엘’로 불려왔다”고 밝혔습니다.

발도파는 위클리프나 후스와 함께 전 종교개혁 운동 역사에서 복음주의의 빛 중 하나로 여겨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 내에서 성경을 더 충실히 따르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더 일관성 있게 행하기를 원했던 소수 그룹이었습니다. 중세 교회는 이러한 운동으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설교자의 왕자, 찰스 스펄전 별세

설교자의 왕자, 찰스 해돈 스펄전 목사가 1892년 1월 31일 58세의 나이로 프랑스 망통에서 별세했습니다. 스펄전은 1834년 영국 에섹스에 있는 켈비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프랑스 위그노의 후손으로 45년 이상 목회한 비국교회 목사였고 아버지 역시 경건한 독립교단 목사였습니다.

스펄전은 2살 때 할아버지 집에 보내져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가 소장하고 있던 청교도적 경건 서적들을 읽으며 자라났습니다. 15살이 되던 1850년 12월 6일 스펄전은 프리미티브 메소디스트 교회 평신도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회심을 체험했습니다. 그 후 성경을 공부하던 중 1851년 5월 3일 침례교에 입문, 침례를 받고 1852년 침례교회 목사가 돼 워터비치의 작은 교회를 담임했습니다. 이 기간에 스펄전은 말씀과 기도로 주님의 교회를 섬기며 위대한 설교가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1854년 스무살에 런던 남부 뉴파크스트리트교회(New Park Street Church) 담임목사로 초빙돼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고 232명이던 신자는 1891년 5311명으로 늘어났고 그동안 세례를 받은 사람도 1만4460명이나 되었습니다. 1857년엔 2만3654명의 청중 앞에서 설교할 정도로 명성 있는 설교가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인근 음악당으로 자리를 옮겨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 숫자는 런던 집회 사상 최대 숫자였다고 합니다. 결국 1861년 메트로폴리탄 태버내클을 건축하기에 이르렀고 그는 매주 1만여명의 청중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1867년 34세에 과로와 신경 쇠약으로 한동안 몸져눕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평생에 계속될 류머티즘과 통풍 그리고 우울증으로 고통받기 시작합니다. 이 해에 D L 무디가 런던을 방문해 스펄전의 설교를 처음 듣고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의 설교는 철저하게 청교도 신학에 뿌리를 두었습니다. 또 전통적인 교리를 생동감 있고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설교 시간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바른 복음을 감동적으로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스펄전을 가리켜 혹자는 ‘사도 시대 이후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유능한 설교자’로 평가했습니다. 스펄전은 1869년 스톡웰 고아원을 설립해 아이들에게 기독교적인 가르침을 제공하는 등 탁아 사업과 성경 보급 등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1887년 목회 일선에서 은퇴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성실하게 말씀을 연구하며 복음과 구원 문제에 철저했고 또 사회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1891년 ‘전리품을 나누는 다윗의 규례’라는 제목으로 태버내클에서 마지막 설교를 했습니다. 이후 요양을 위해 아내와 함께 프랑스 망통으로 떠났습니다. 이듬해 그는 사망 직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럽고 불쌍하고 무력한 벌레인 제가 주의 친절하신 팔에 안깁니다.”

바흐의 재발견, 멘델스존이 태어나다

1809년 2월 3일 독일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이 함부르크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오라토리오 ‘엘리야’는 헨델의 ‘메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꼽힌다. 교회 성가대에서는 엘리야 중 ‘주께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리라’를 많이 부른다. 그는 80년 동안 잊혀졌던 바흐의 음악을 재발견한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멘델스존은 부유한 시민층 계급의 명망이 있는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명한 철학자인 모제스 멘델스존은 그의 할아버지입니다. 멘델스존의 모든 가족들은 1816년 3월 21일 루터교 목사로부터 개신교의 가정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멘델스존은 야코프 루트비히라는 세례명을 받게 됩니다.

멘델스존은 색채적이며 우아한 낭만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바이올린 협주곡은 베토벤과 브람스의 곡과 함께 3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손꼽힙니다. 그의 유명한 작품은 바흐의 고전 음악 연구를 통해 얻었고 바흐를 세상에 소개한 공적은 음악사에서 높이 평가를 받습니다. 그는 낭만파의 선구자로 신고전파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값싼 은혜를 경계하라, 본회퍼 목사 출생

1906년 2월 4일 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가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에 대항해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을 온몸으로 설득력 있게 호소한 개신교의 영향력 있는 신학자입니다.

튀빙겐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1923~1927년) 이때 아돌프 하르낙, 라인홀드 제베르크, 칼 홀 등의 역사신학자와 칼 바르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회중교회 부목사, 미국 뉴욕 유니온신학교 교환학생(1930년), 베를린대학 조직신학 강사(1931년)를 지냈습니다.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 본회퍼는 정권 반대, 반유대주의 반대 운동에 적극 가담하면서 나치에 반대하는 고백교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했습니다. 또 갈수록 민족주의로 변해가는 독일에 항거하는 독일교회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미국 영국 등지에서 활동했습니다.

1938년 독일의 히틀러 정권 전복 음모에 가담했고 미국 망명도 권유받았지만 독일에 남아 저항 운동을 계속하다 1943년 4월 5일 체포돼 베를린에 수감되었습니다. 이후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한 문서들이 발견되면서 1945년 4월 9일 플뢰센베르크(바이에른)에서 처형당했습니다.

‘나를 따르라’ ‘제자도의 대가’ ‘윤리학’ ‘옥중서신’ 등을 쓴 그는 히틀러를 ‘무고한 행인들을 향해 차를 몰고 돌진하는’ 미치광이와 같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나를 따르라’에서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숙적이다. 오늘 우리의 투쟁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투쟁”이라며 예수 따르기가 실종된 기독교계 한복판을 비판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값싼 은혜’에 대한 설명은 이렇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울림이 크게 다가옵니다.

“값싼 은혜란 투매 상품인 은혜, 헐값에 팔리는 용서, 헐값에 팔리는 위로, 헐값에 팔리는 성찬,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서 무분별한 손으로 거침없이 무한정 쏟아내는 은혜, 대가나 희생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은혜를 의미한다.…값싼 은혜는 실로 우리 대다수에게 무자비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지 않고 도리어 차단하기만 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를 따르라고 부르기는커녕 우리를 둔하게 만들어 불순종하게 했다.…은혜가 값비싼 것은 따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멍에를 씌우기 때문이고 그것이 은혜인 것은 예수께서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그리스도교는 따르기가 없는 그리스도교에 지나지 않고 따르기가 없는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그리스도교에 지나지 않는다.…세상이 지금보다 더 끔찍하게, 지금보다 더 절망적으로 기독교 세상이 된 적이 있었는가.…값싼 은혜는 우리 개신교회에 대단히 무자비했다.”

[참고서적]

가스펠서브 기획, 편저, 생명의말씀사

디트리히 본회퍼 지음, 김순현 옮김, 복있는사람

김기홍 지음, 두란노

후스토 곤잘레스 지음, 서영일 옮김, 은성

후스토 곤잘레스 지음, 서영일 옮김, 은성

콜린 듀리에즈 지음, 홍병룡 옮김, 복있는사람

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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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억 광고 수익 숨기고 해외 여행 유튜버’, 재산 추적한다 김동일 국세청 징세법무국장이 28일 정부세종청사 국세청에서 지능적 재산은닉 고액 체납자 집중 추적조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뉴스1 유명 유튜버 A씨는 매년 수억 ... Read more »

식사 직후 '과일' 먹는 습관… 당장 멈춰야 하는 이유

건강을 위해 매일 과일을 챙겨 먹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과일도 언제 먹느냐에 따라 몸에 끼치는 영향이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식사 후 곧바로 과일을 먹는 습관은 오히려 독이 될 수 ...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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